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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May 01. 2022

할머니 92세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할머니,


어젯밤 시원한 봄비가 한차례 쏟아지더니, 오늘 아침은 파란 하늘 아래 더 많은 꽃망울들이 고개를 내밀었어요. 싱그러움 가득한 산책로를 걷다가 이름 모를 새 한 마리를 만났는데 울음소리가 부엉이와 비슷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나무 옆에서 새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봤어요. 그리고 산책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 검색을 했지요. 그랬더니 부엉이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이 새의 이름은 우리말로 '염주(念珠) 비둘기' 영어로는 'Eurasian Collared Dove'라고 적혀있었어요. 할머니의 아흔두 번째 생신을 맞아, 염주비둘기의 구수하고 소박한 새소리를 선물로 드릴게요. 


할머니, 제가 어릴 적 살던 우리 집 정원에 있던 자그마한 덩굴나무 기억하시죠? 그 나무 아래 할머니께서 돌보시던 노란색 카나리아가 살고 있는 원형 모양의 금장 새장이 매달려 있었잖아요. 아침이 오면 할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마당에 나가, 새장에 깨끗한 물과 모이를 정성껏 넣어 주셨죠. 저는 까치발을 하고 올려다보아도 둥근 새장의 밑부분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노란 새가 청량한 소리로 할머니께 인사하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매일 아침 할머니께서 얼마나 꼼꼼하게 새의 건강을 살피시고 새장을 깨끗하게 청소하셨던지, 곁에서 할머니의 섬세한 손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한 생명을 향한 정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절차가 아침을 맞이하는 할머니의 신성한 의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직 어렸지만 저에게도 솜털만큼의 양심은 있었던지, 그 순간만큼은 까불지 않고 얌전히 지켜봤던 걸로 기억해요.


그러고 보니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새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할머니께서 떠나신 해의 어느 가을날 겪은 신비로운 일이에요. 제 기록에는 2010년 10월 28일이라고 적혀있네요. 그날 아침은 평일이어서 저 혼자 조용히 집에서 여느 때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서재 창문 너머에서 맑은 새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어요. 그래서 덧문을 열고 좀 더 자세히 밖의 모습을 관찰해보니, 작은 새 한 마리가 다가와서 유리창을 콕콕 부리로 두드리는 거예요. 마치 노크하듯이 말이죠. 저는 순간 눈물이 핑 돌면서 "어- - - - 할머니? 할머니, 나 보러 온 거야?" 하고 새한테 물어봤어요. 그때가 할머니를 여위고 4개월 정도 흐른 뒤였으니, 제가 얼마나 할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었을지 쉽게 짐작이 가시죠? 그래서 저는 그 새를 할머니라고 생각했어요. 


반가운 마음에 현관문을 열어보니 '할머니 새'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집 안 곳곳을 자유롭게 날아다녔어요. '할머니 새'는 1층 거실과 서재를 잠시 둘러보더니 2층 안방으로 올라갔고, 저도 열심히 "할머니 할머니"하고 부르면서 따라갔어요. 누군가가 봤다면 정신이 나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냥 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렇게 '할머니 새'는 저랑 같이 점심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랄라가 학교에서 돌아오고, 스톰이 퇴근을 할 때까지 집 안에 머물렀어요. 드디어 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거예요.


시간이 흘러 하늘이 연분홍으로 물들 무렵, '할머니 새'는 거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어요. 이렇게 영영 헤어지는가 보다 하고 아쉬운 마음이 앞설 줄 알았는데, 이별의 시간이 되니 오히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집에 머물러 준 것만으로도 고맙더라고요. 그래서 가뿐한 마음으로 문을 열어 주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할머니 새'는 저희 집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이번에는 자리를 옮겨서 뒤뜰 의자에 앉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잠시 후, 비슷하게 생긴 또 한 마리의 새가 날아와 '할머니 새'가 앉아있는 의자 옆에 앉았어요. 그렇게 한동안 두 마리의 새가 사이좋게 새소리를 내며 쉬는 듯하더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같은 방향으로 함께 훨훨 날아갔어요. 그날 밤 '할머니 새'가 어두운 하늘 속으로 혼자 날아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저는 그 다른 한 마리의 새를 지금까지도 할머니를 마중 오신 '할아버지 새'라고 믿고 있어요. 


그리운 할머니, 


지난주에는 애도에 대한 강의를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애도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이다."라는 짧은 문장만 가슴에 남았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명치끝에 달린 고드름의 무게를 실감했어요. 평소에는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의 고드름은 한 방울씩 눈물이 되어 떨어져 내려요. 그것이 상실과 애도의 과정이라고 믿고 있지만, 오늘 같이 할머니가 더욱더 그리워지는 날에는 혹시라도 그 고드름이 모두 녹아 없어질까 봐 두렵기도 해요. 이 고드름의 존재가 할머니와 저를 이어주는 영혼의 증표이며,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통로라고 믿고 있는 저를 너무 크게 나무라지는 말아주세요. 


지금의 제 삶은 12년 전에 비하면 훨씬 간소하고, 단순하며, 자유롭다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어요. 이 또한 할머니께서 주신 귀중한 유산이므로 언제나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어요. 할머니의 손녀로 살아온 시간과 할머니를 애도하며 살아온 시간이 만나, 저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과 성찰의 장을 선물해 줬는지 할머니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거라고 믿어요. 할머니의 아흔두 번째 생신을 맞아, 평생토록 저에게 말씀하셨던 자연에 대한 존중, 선(善)한 삶에 대한 당부를 앞으로도 잘 따르고 실천할 것을 약속드릴게요.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할머니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할머니, 제 앞에 놓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그토록 그리던 할머니와 해후하는 날이 오겠죠?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는, 카나리아의 깃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시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제가 할머니의 은빛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드릴게요. 그리고 우리는 아주 오래전 그날의 아침처럼 환한 얼굴로 햇살 가득한 연둣빛 덩굴나무 아래 함께 서 있을 거예요. 


할머니 많이 많이 사랑해요. 오늘 밤 꿈에 만나요. 나잇 나잇!


2022년 3월 7일 (음력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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