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日是好日
2012년 9월 9일
이번 주말에 들어서면서 완연한 가을이 시작되었다. 나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옷장 정리를 하고, 침구를 바꾸는 일을 하면 기분 좋은 설렘을 느낀다. 그런 일상의 변화를 진심으로 즐기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살아가는 맛과 멋을 음미하게 된다. 올해도 예년과 다름없이 대청소로 맞이하는 가을. 랄라가 친구 집에 놀러 간 사이를 틈타 스톰과 나는 열심히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온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묵은 떼와 먼지를 철저히 벗겨내는 대청소를 하는 동안, 실내에서는 하루 종일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청소기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대청소를 시작한 김에 랄라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어보자고 스톰이 제안했고, 나는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거운 책상을 함께 들어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는 방바닥에 쓰러져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랄라의 책상을 옮기는 도중에 책상 모서리와 벽면 사이에 오른쪽 엄지가 꽉 끼면서 날카로운 책상 모서리 부분에 손가락의 피부가 찢기고 파인 것이다. 순간 지혈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는 피를 보자 양손이 바들바들 떨려 속수무책이었다.
스톰은 도와주고 싶어 나에게로 오려했지만, 우리 둘 사이에 랄라의 책상이 완전히 통로를 막고 있는 상태인지라, 스톰은 결국 책상 밑으로 기어서 나한데로 왔다. 아... 그러나... 나의 소심한 스톰... 지혈이 우선이니 빨리 내 손가락을 꽉 눌러달라고 했더니, 스톰은 어쩔 줄 몰라하며 "그대 피부가 찢어져서 아플까 봐 너무 세게는 못 누르겠어. 지금도 아프다고 우는데, 내가 꽉 누르면 더 아플 거 아냐." 순간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납득이의 대사가 떠올랐다. "널 어쩌지?" 여하튼 결국은 떨리는 내 손을 사용해서 가까스로 지혈을 하기에 이르렀고, 스톰은 일단 1층으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
칼에 비해 훨씬 둔탁해 보이는 책상 모서리가 벽과 만났을 때 이렇게 무서운 흉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날 처음 알았다. 응급처치를 하고 난 뒤에도 손의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엄지 뼛속 깊은 곳까지 얼얼하고 우리한 아픔이 떠나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스톰이 청소는 이제 자기가 마무리할 테니 그냥 누워서 쉬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1%의 완성을 남겨놓고 손이 다쳤다고 침대에 편히 누워있을 내가 아니다. 왼손을 사용해서 마무리 작업까지 모두 깔끔하게 마치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음악을 들었다.
하룻밤을 잤는데도 상처부위에서 피와 진물이 계속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 아침 샤워는 혼자서 할 수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처음으로 랄라에게 엄마의 머리를 감겨달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스톰에게 부탁하면 간단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랄라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우리 랄라가 오동통한 다리를 내놓고, 아예 욕조 안으로 들어오더니 위풍당당 샤워기를 꺼내 작은 손으로 오밀조밀 내 머리 구석구석을 마사지하며 깨끗하게 샴푸를 해주었다. 그리고 트리트먼트를 바른 뒤에는 예쁜 샤워캡을 야무지게 씌어주면서, 머리에 트리트먼트가 스며들 때까지 몸을 씻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달콤함 향기로 에워싸인 따뜻한 욕조에 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나이 들고 몸이 많이 아프게 되면, 우리 랄라의 도움으로 목욕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슬퍼졌지만, 언젠가는 그 또한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랄라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용기, 나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랄라의 마음가짐, 그리고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비록 가을맞이 대청소는 예년보다 훨씬 소란스럽게 끝났지만, 덕분에 새로운 경험과 깨우침을 얻은 하루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