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공존

日日是好日

by Rainsonata


심리치료를 원한다면 내담자는 반드시 치료 동의서에 서명해야 한다. 내담자의 동의를 묻는 계약서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심리치료사의 법적 의무이며, 내담자의 서명 없이는 어떤 치료도 시작할 수 없다. 석장으로 구성된 나의 치료 계약서에는 자기소개, 약력, 심리치료에 대한 철학, 비밀보장의 원칙 및 응급 대처 방법을 포함한 내담자가 꼭 숙지해야 할 사항이 가득 채워져 있다. 심리치료사는 내담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계약서의 내용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이 과정에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심리치료의 한계성과 심리치료사 또한 치료 능력의 제한이 있는 보통 사람이라는 점이다.


솔직한 자기소개는 앞으로 신뢰를 함께 쌓아가고, 치료적 관계를 맺게 될 내담자에 대한 예의이자 다짐이기도 하다. 나는 심리치료사로서 이 일이 좋고,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출근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서고,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동안의 심리치료와 인생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듯,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 눈앞에 놓인 한계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잘 받아들일수록, 심리치료의 다양한 가능성과 내담자가 지닌 성장 가능성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여러 모양의 한계성과 가능성이 골고루 존재한다.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한계성 덕분에 조금 더 현실적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까지’라는 한계성은 우리에게 물리적/심리적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불균형한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알려주는 ‘경보벨’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가능성은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선물해준다. 결국 심리치료사가 내담자에게 ‘한계성’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행위는, 치유의 여정에서 경험하게 될 우리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작년에 방영된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을 보는 동안, 나는 ‘인생은 살아갈 때도 있지만, 살아질 때가 더 많구나’라고 느꼈다.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 중년의 구조기술사는 아이유가 연기한 부하 직원 지안과 함께 어둠이 찾아온 동네 골목길을 걸으며 이렇게 말한다.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해서 그것에 견딜 수 있는 내력을 쌓는 거야.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그러자 지안이 묻는다.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동훈은 아무 말 없이 걷다가 “몰라”라고 대답한다.


계절과 함께 산천초목만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도 변한다. 나는 여전히 나이기도 하지만, 이전의 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가고 오는 세월 덕분에 어느 정도는 내려놓았으나, 아직 많은 것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 또한 나의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일 것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는 꾸준히 변화와 성장을 거듭했다. 그렇게 나는 한계성과 가능성을 오가며 버티며 살아온 듯하다. 만약 인간으로서의 한계성을 부정한다면, 우리의 가능성을 믿는 것 또한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한계성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일깨워주고, 가능성은 우리의 자긍심을 키워준다. 빛과 어둠은 모두 소중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계성’과 ‘가능성’의 조화로운 공존은 필요하며, 우리도 이런 환경에서야 비로소 지안(至安)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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