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몽각
작년 여름 아빠는 당신이 사용하시던 사진기 중, 가장 가벼운 소형 카메라 한 대를 제외한 모든 사진기와 렌즈 그리고 촬영 도구를 몽땅 스톰에게 주셨다. 아빠가 노년의 열정을 담아 시간과 정성을 쏟아온 사진과의 인연이 슬프게도 아빠의 몸에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 채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아빠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당시 아빠 마음은 말줄임표와 도돌이표 사이를 무한 반복하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하는 쓸쓸한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십여 년 전 아빠는 국선도와 사진을 시작하셨다. 국선도가 아빠의 신체적 건강의 지지대가 되어 줬다면, 사진은 아빠의 정신적 건강의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아빠는 사진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교육원에 수강 신청을 했고, 몇몇 유명한 사진작가로 부터 개인 수업도 받으실 만큼 열심이었다. 그리고 수업이 없는 날에는 그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등에 메고, 전국 곳곳의 산사와 시골 장터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는 연습을 하셨다.
처음에는 가족들도 아빠의 새로운 취미 생활을 지지했지만, 아빠가 연세 드신 몸을 이끌고 사진 촬영을 위해 네팔을 다녀오시면서 점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지금은 건강하시지만 이렇게 계속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메고 긴 시간 씨름을 한다면 몸에 무리가 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빠가 체력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사진에 너무 큰 투자를 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꿋꿋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고, 꽤 시간이 흐른 후 사진 공모전에서 작은 상을 받기도 하셨다. 어느 날, 아빠는 당신이 앞으로 사진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서, 훗날 인사동 작은 화랑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 노년의 꿈이라고 말씀하셨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얼마 전부터 아빠는 허리의 심각한 통증을 호소하셨고, 결국은 수술을 받게 되셨다. 수술 후 아빠가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여러모로 준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당신의 체력의 한계점에 대한 수용과 더 이상 무거운 카메라를 사용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십여 년간 사용해온 정든 사진기와 헤어질 준비를 위한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해 여름, 아빠는 소중한 카메라를 모두 큰 가방에 담아 스톰에게 직접 전했다.
그럼 왜 아빠는 이 많은 사진기를 스톰에게 주셨을까?
대학원에서 영화 전공을 한 스톰은, 재학 중 사진과 교수로부터 사진에 소질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전공을 사진으로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진지한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새벽부터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했던 스톰에게 재료비가 많이 드는 사진을 전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빠는 스톰이 아직도 사진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을 품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고, 그렇게 아빠의 사진기는 아빠의 하나뿐인 사위 스톰에게 전해졌다. 사진에 대한 열정은 컸으나 이제 몸이 허락지 않아 사진을 그만두신 우리 아빠, 그리고 사진에 대한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형편이 여의치 못해 사진을 포기해야 했던 스톰, 두 남자 사이에는 그렇게 사진을 향한 애잔한 강물이 흐르고 있다.
할머니가 떠나신 해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윤미네 집>이라는 사진집을 우연히 만났고, 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당시 사진의 매력에 흠뻑 빠져 계셨던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 집> 사진전에 대한 말씀을 드렸더니, 아빠는 바로 전시회장을 찾으셨다. 그리고 아빠는 작품이 전하는 감동과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의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훌륭한 전시회였다고 말씀하셨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아빠가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기억하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 어렵고 고단했던 시절을 함께 보낸 아내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의 출생에서부터 결혼식 날까지의 성장을 아빠의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한 모습을 만나보고 싶다면, 여러분께 토목 학자이자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하셨던 (故) 전몽각 교수의 <윤미네 집>을 추천하고 싶다. 진심이 주는 감동과 사진이 주는 울림을 여러분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