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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Sep 30. 2022

루피와 엘리

야옹이 집사

2022년 9월 29일 목요일


사방이 안개로 자욱하다. 항상 같은 창가에 앉아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루피의 모습도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 이전에는 밖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으면 먼저 반응하던 루피였는데, 안개가 내려앉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작은 몸을 납작하게 웅크리고 휴식모드로 전환한다. 가끔 밖에서 소리가 들려오면 루피는 쫑긋쫑긋 까만 삼각형 귀를 움직이며 반응할 뿐이다. 언제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에게 우리 가족은 '철학가 루피' '사색가 루피'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수백 장의 야옹이 사진 중 대부분은 루피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그런 루피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심장박동수도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닮아 간다.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루피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다 보니, 엘리도 소개하고 싶어 진다. 


엘리는 열한 살이고, 처음 만났을 때는 아기 고양이 세 마리의 엄마였다. 엘리네 가족을 만난 건 약 10년 전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구조된 고양이들을 돌보는 위탁가정으로 동물 보호소에 등록되어 있었다. 고양이가 구조되면 우리 집으로 연락이 오고, 우리는 고양이들의 음식과 잠자리와 정서적 돌봄을 제공하고, 동물 보호소 측은 고양이의 건강 검진, 예방 접종, 중성화 수술을 책임진다. 그렇게 입양 준비가 완료되면 우리 집에서 생활하던 고양이를 다시 동물 보호소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위탁가정의 임무는 끝난다. 그 후 건강을 되찾은 고양이는 새 가족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다른 고양이들과 그곳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미 엄마가 된 엘리를 입양하겠다는 곳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회의를 통해 엘리를 새 식구로 맞이하기로 결정했고, 그녀는 변함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십 년째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루피와 엘리는 아주 다르다. 자식만 아롱이다롱이가 아니라는 걸 나는 엘리와 루피 덕분에 배웠다. 엘리는 총명하고 속이 깊은 특별한 야옹이다. 엘리가 우리 식구가 된 해 겨울, 랄라가 나한테 크게 혼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함께 백화점을 갔는데, 랄라의 부당한 요구와 보챔이 그날따라 끝이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랄라를 호되게 꾸짖었다. 엄마에게 혼난 뒤, 랄라가 거실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는데, 엘리가 곁으로 다가가서 랄라의 얼굴을 살피는가 싶더니, 자신의 발톱을 숨기고 보드라운 발바닥으로 랄라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혀로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에서 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엘리의 자비로운 행동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엘리는 그렇게 우리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위로해 주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야옹이다.


이 두 야옹이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우리 랄라는 어떤 숙녀로 성장했을까? 스톰과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을까? 우리는 루피와 엘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았다. 고요하고 은은한 정서적 안정감, 천천히 쉬어가는 삶의 지혜,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사랑의 표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음,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는 여유로움, 적당한 음식과 잠자리가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깨우침,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유대감, 느슨하면서도 편안한 친밀감,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감사.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선물해 주는 엘리와 루피는 우리의 내면까지도 환하게 비춰주는 귀한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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