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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Sep 26. 2022

비보(悲報)

哀悼

2022년 9월 26일 월요일


지난주 목요일 늦은 밤 랄라로부터 문자가 왔다. "R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슬퍼요." R은 랄라와 일 년 동안 함께 생활한 룸메이트 중 한 명이다. 우리 가족은 불과 열흘 전에 R과 마주 앉아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랄라가 한국에서 여름 학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을 때, R이 랄라에게 연락을 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R 아버님은 올여름부터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지셔서 병원을 자주 찾게 되었는데, 8월 마지막 주에 말기암이라는 최종 진단을 받으셨다. 그 후 R은 집-병원-학교를 오가며 부모님을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해내고 있었다. 그런 R이 안쓰러우셨는지 아빠는 아들에게 바람 좀 쐬고 오라 권했고, R은 우리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고 싶어 했다. 


평소에도 랄라는 R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그분들도 우리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고 다정다감한 분들이셔서, 엄마 아빠와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친구 부모님이 음식을 챙겨 아파트를 방문했다며, 왜 엄마 아빠는 자기를 보러 캠퍼스에 더 자주 오지 않냐는 투정도 부렸다. 랄라와 R은 생일도 같은 주에 있어서, 작년 10월에는 우리가 한 번, 그 친구네 부모님이 한 번,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에 가서 '열아홉 살' 생일상을 차려주고 오기도 했었다. 스톰과 나는 랄라의 룸메이트들과 친구들을 초대해서 한국식으로 고기를 구워줬는데, 그때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내가 날라주는 고기를 복스럽게 먹던 R의 모습이 귀여웠던 기억이 있다. 


역시 밥을 같이 먹으면 사람은 가까워지나 보다. 그 만남을 계기로 스톰과 R은 각자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우연히도 스톰이 다니고 있는 회사와 R이 앞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하고 싶어 하는 분야가 일치했다. R은 스톰에게 여러 질문과 조언을 구했고, 둘은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우리가 6월에 아이들 아파트에 가서 랄라의 짐을 옮겨올 때도, R은 언제나처럼 상냥했고 자기 차에 우리를 태워주려고 아침 일찍 세차까지 하고 왔다고 했다. 스톰과 나는 R의 그러한 세심한 배려가 고맙고 예뻤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분명 R의 부모님께서도 좋은 분이실 것 같았다. 


열흘 전에 다시 마주한 R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팟을 앞에 두고 아빠에 대해 이야기했다. R 아버님은 중국의 어느 가난한 지방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른이 된 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고 한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하고 열심히 일해서, 코스트코와 거래할 정도로 큰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R의 누나는 중학생 때부터 학업과 글쓰기에 놀라운 두각을 나타낸 수재라고 한다. 그녀는 몇 년 전에 뛰어난 성적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자신이 설립한 NGO의 CEO가 되어 지금은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기에 바쁜 누나를 대신해서 R은 투병 중인 아빠와 상심한 엄마를 돌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날 R은 식사를 마치고 우리 집에서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늦게 돌아갔다. 때마침 추석에 빚었던 만두를 얼려 놓은 것이 있어서 R에게 들려 보냈는데, 다음 날 엄마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그렇게 아이와 헤어지고 열흘 뒤에 이처럼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R로부터 이미 아버님이 저명한 암 전문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들었던 터라, 더욱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는 R 아버님이 한방 치료를 시도해보려고 다른 클리닉으로 이동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승용차 안에서 심각한 내부 출혈이 발생했고 바로 심정지가 왔으며, 그 후 응급조치를 받고 기적적으로 소생됐으나 몇 시간 후에 황망하게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나는 돌아가신 고인의 명복을 빌며 향을 사루어 올렸다. 푸르스름한 초승달이 아름답고 슬픈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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