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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Oct 14. 2023

빨래

즐거운 중독

2023년 10월 13일 금요일


나는 빨래를 좋아한다. 집안일에서 딱 하나만 골라서 죽는 날까지 해야 한다면 나는 '빨래'를 선택할 것이다. 빨래에는 중독성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그것조차도 즐긴다. 우리 집에는 작은 세탁기 하나가 놓여있는 아담한 세탁실이 있다. 세탁기 위에는 사각형 모양의 등나무 바구니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 바구니 안으로 세탁물이 하나씩 모여드는 과정을 관찰해 보면 우리 가족의 옷, 속옷, 타월, 침구가 어떤 리듬으로 순환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랄라가 캠퍼스에 있을 때와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우리가 여행을 다녀왔을 때와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봄/여름과 가을/겨울 계절에 따라 빨래바구니가 채워지는 속도와 내용물은 달라진다. 나는 빨래라는 의식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빨래를 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족을 향한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바삭바삭 햇살에 잘 말려진 세탁물을 정리할 때면 잔잔한 안도감을 느낀다. 오래 입어서 눈에 익은 옷가지들을 다시 제자리에 걸어 둘 때면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토닥토닥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언제부터 빨래를 좋아했을까? 학생이었을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기숙사나 아파트의 세탁실을 사용해야 했던 불편함도 만만치 않았고, 빨래가 다 끝날 때까지 드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무척 비효율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공부량이 적고 시간이 여유로운 날을 택해서 세탁실로 향했다. 여하튼 '나는 언제부터 빨래를 좋아했을까?'의 답을 찾다가 오래전 써놓은 일기를 만났다. 



2005년 1월 28일 


다시 찾아온 감기로 이번주 내내 게으름을 피웠더니 이제 마룻바닥에 먼지가 눈에 보이게 늘었다. 랄라의 책꽂이의 책들도 삐쭉빼쭉, 얼마 전부터 콩나물국밥을 할 때 넣으려고 냉동고에서 냉장고 칸으로 내려놓은 바지락도 아직 대기 중이고, 컴퓨터 책상에는 랄라의 스파이더맨이 큰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고, 무엇보다도 빨래거리가 한가득이다. 

바깥 기온은 여전히 영하 20도라고 하는데 창가에 서서 보니 하얀 눈만 보이지 않는다면 늦가을이라고 생각될 만큼 하늘은 푸르고 날씨 또한 쾌청하다. 한동안 겨울바람에 시달리던 나무들도 오늘 만큼은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다행히 몸에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해서 오늘 아침부터 서둘러 빨래를 했다. 그 덕에 지금 랄라의 인형옷 크기만 한 바지, 원피스, 카디건, 곰돌이 팬티들은 햇살을 맘껏 쬐이고 있다.

나는 유난히 빨래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특히 도톰한 타월들이 보송보송 마른 것을 확인하며 사각으로 접어 장에 넣어 놓을 때의 그 촉감이 좋고, 랄라의 앙증맞은 옷들을 작은 빨래건조대 위에 가지런히 펼쳐 널을 때 엄마가 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또 랄라 팬티 엉덩이 부분에 그려진 여러 가지 (백설공주, 신데렐라, 테디베어, 헬로키티, 트위디, 쿠키 몬스터, 알모 등등) 그림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속옷장에 넣어줄 때면 랄라의 보들보들한 엉덩이의 감촉이 떠올라 혼자서 미소 짓곤 한다. 그리고 우리 집 지킴이 스톰의 양말 짝을 맞출 때는 '그래... 오빠가 이거 신고 우리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거야...'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집안 청소를 마치고 햇살 가득한 소파에 혼자 앉아 오늘의 묵상집을 열어보니 "소박한 삶은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라고 적혀 있다. 소박한 삶. 어쩌면 이외로 가까이 있지만 우리는 쉽게 찾지 못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갖지 못했기에) 그 주변만 맴돌다 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일은 신나는 주말! 마치 밀린 방학숙제를 모두 끝낸 학생처럼 집안을 말끔히 치워놓고 나니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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