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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Oct 11. 2023

안개

두 얼굴의 그녀

2023년 10월 10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랄라가 보낸 사진이 도착해 있다. 새벽 1시에 자신이 지내는 아파트에서 찍은 풍경인데 온 동네가 마치 해리포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몽롱한 빛의 안개로 뒤덮여 있다. 블라인드를 열어 밖을 내다보니 우리 동네에도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낀 날은 엘리와 루피도 한층 더 포근한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캘리포니아 남부는 다시 찾아온 열파로 인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를 겪어야 했다. 그 대신 이상 기온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고운 붉은빛의 노을이 며칠간 이어졌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안개 낀 풍경을 바라보니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기에 깊은 산속에 머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곳에 있을 때 남긴 메모를 열어보니 이렇게 적혀있다.



해발 5500 피트에 위치한 산속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2주를 보낸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꾸린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인상 깊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새, 안개, 이슬, 얼음, 비, 눈, 바람, 파란 하늘, 구름, 나뭇잎의 너울거림, 흙, 자갈, 햇살, 맑은 공기, 고요, 달, 별, 어둠, 벽난로, 커피 향기, 이끼, 도토리, 솔방울, 버섯, 걷기, 침묵, 그림자, 대화, 만남, 휴식, 낮잠, 간소한 삶 (2021년 4월 29일)



우리가 묶었던 곳은 산 정상 가까이에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지내는 동안 태어나서 가장 짙은 안개를 경험했다. 그날 아침은 매주 진행하는 온라인 슈퍼비전을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슈퍼바이지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인터넷 연결이 먹통이 된 것이다. 숙소의 주인에게 급하게 연락을 하니, 가끔 그런 일이 있는데 집에서 5분 정도 차를 타고 산길을 내려가면 친한 친구네 집이 있다고 했다. 그 집은 와이파이 신호가 더 강해서 인터넷 연결이 쉬울 테니 일하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리고 친구에게는 지금 사정을 설명해 놓을 테니 일할 준비가 되는대로 이 주소로 찾아가 보라고 문자를 보내줬다. 나는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새 주소를 전화기에 입력한 뒤, 바로 길 찾기 앱을 켜고 차로 향했다. 


그런데 차를 몰고 나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밀도의 안개를 만났다. 눈앞에 펼쳐진 장막은 분명 안개였으니 안개라고 밖에 달리 부를 수 없겠지만, 당시 전조등 하나에 의존해서 그 두꺼운 안개를 헤치며 운전했던 나에게 눈앞의 물질은 촉촉한 안개가 아니라 단단한 벽처럼 느껴졌다. 순간 폐소 공포증과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아득한 공포가 엄습해 오는가 싶더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깊은 산중에서 안개라는 벽에 갇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나는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실컷 삼켰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하면서 최대한 동물적 감각으로 천천히 운전했다. 사방은 젖은 잿더미 같은 안개뿐이었고 주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인지할 수 있는 건 차, 나, 안개, 그리고 '통신 장애 전화 서비스 불가' 표시가 뜬 전화기가 전부였다.


누군가는 나에게 차를 돌려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절대적인 안개의 방에 갇히게 되면 사면이 모두 안개뿐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방향 감각을 잃게 된다. 더군다나 지금 운전하고 있는 곳이 해발 5500 피트의 산길이라고 상상해 보라. 차를 돌리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시야 확보가 불가능한 곳에서 차를 돌리다가 더 큰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앞으로만 전진했다. 처음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에 서서 걸음마를 배우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아주 조심조심 앞으로 앞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그렇게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불현듯 '모든 것에 끝이 있듯 안개에도 끝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 끝을 만났다. 그런데 이 안개의 끝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노릇이냐면, 안개가 점차 옅어지면서 서서히 걷힌 게 아니라, 마치 안개의 띠가 거대한 가위에 의해 싹둑 잘라져 나간 그런 느낌이었다. 실제로 내가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안개가 끝나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다. 정말 어둠과 빛의 경계선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깨달았다. 안개의 끝과 시작은 한 지점에서 두 얼굴을 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안전하게 운전해서 산길 오른편의 작은 식료품 가게에 무사히 도착했고, 그곳에 차를 세우니 통신 장애 표시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길 찾기 앱도 작동을 시작했다. 한 시간의 슈퍼비전을 마치고 다시 오두막으로 향할 즈음에는 맑게 개인 하늘과 봄날의 싱그러운 새소리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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