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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Nov 04. 2023

책과 독서

林語堂

2023년 11월 3일 금요일


금요일 아침에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유칼립투스와 카모마일 향기가 나는 목욕 소금을 풀고 전신욕을 한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요즘에는 더욱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욕실은 민트향이 그윽하고 반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아침 바람이 블라인드를 스친다. 나는 깊숙이 몸을 담그고 아담한 공간을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을 감상한다. 그러다 또 고질병이 도졌다. 얼마 전에 읽은 린위탕(1895-1976)의 글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것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자유와 자연과 인간을 사랑한 린위탕(林語堂)은 중국이 낳은 '세계적 석학' 또는 '세계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은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20세기 초부터 동서양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며 수많은 종류의 글을 남겼고, '한적한 삶'의 기품을 알리고자 꾸준히 노력한 생활 철학자이기도 하다. 


린위탕의 <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을 공감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책과 독서'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 그의 견해를 함께 살펴보자.




젊어서 책을 읽음은 틈으로 달을 바라봄 같고, 중년에 책을 읽음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봄 같고, 노경에 이르러 책을 읽음은 창공 아래 발코니에 서서 달을 바라봄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이다.


글자 없는 책(즉, 인생 그 자체)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지극히 현묘한 말을 할 수 있다.


문학은 책상 위의 픙경, 풍경은 땅 위의 문학이다.


독서술의 근본을 통달한 자는 만물이 화하여 책이 됨을 깨닫는다.


책을 사랑하면 언제나 사색과 반성의 세계에 드나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으뜸가는 책은 이러한 명상적인 기분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것이며, 사실의 보고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생각건대, 독서란 무엇이냐는 것을 가장 적절히 말한 공식은 송나라 때의 시인이며 소동파의 친구였던 황산곡(黃山谷)의 설이다. 그는 말했다. "사대부가 사흘을 독서하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말에 맛이 없고,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대하여도 면목이 가증스럽다."


즉 그가 말한 것은 독서는 독서하는 인물에게 매력과 품격을 주는 것으로서 독서의 목적은 이것뿐이며, 이 점을 노리는 독서야말로 '참된 술(術/Art)'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의무 관념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독서법을 모른다. 독서를 과제로 삼는 것은 상원의원이 연설 전에 서류나 보고를 훑어보는 따위의 행위와 같다. 재료나 자료를 찾는 것이지 독서는 아니다.


대화의 품격으로 말하면 오로지 독서 방법에 달려 있다. 말씨에 '풍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독서법 여하에 달렸다. 책의 풍미를 내 것으로 만들면 대화 속에서도 풍미가 우러난다. 대화에 풍미가 있다면 저술에 풍미가 스며들지 않을 리가 없다.


가장 바람직한 식사법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이다. 소화력에 확신이 서기 때문이다. 독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 살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독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기 독서 취미를 학생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부모로서도 아이들이 자기와 같은 취미를 갖기를 기대해선 안된다. 읽는 데 흥미가 없으면 독서는 오로지 시간 낭비다.


그러므로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지적 감흥은 나무처럼 성장하고 냇물처럼 유동한다.


이 세상에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책 따위는 없다. 있다면 오직 누군가가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에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읽어야만 할 책이 있을 뿐이다. 나는 오히려 독서는 결혼처럼 운명이나 인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두 가지 면에서 성립되는 행위이다. 진실로 얻은 바는 독자의 통찰과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과, 저자의 통찰과 체험으로 주어지는 이 두 가지다.


좋아하는 작가의 발견은 자기의 지적 발전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때에는 정신의 친화라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금의 작가 중에서 그 정신이 자기 정신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래야만 참으로 좋은 것이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얻는 것은 이런 독서를 통해서이다. 즉 심취할 작가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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