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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Feb 28. 2024

무화과나무

FIg Tree

2024년 2월 27일 화요일


3개월 동안 고요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글쓰기 창을 연다. 늦가을부터 나는 내담자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을 읽으며 보냈다. 요즘 들어 생긴 한 가지 변화라면 평생 글로만 채워지던 일기장에 그림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기 쓰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졌다. 그런데 일기에 그림을 그려 넣게 되면서 나는 주변의 사물이나 풍경을 이전보다 더욱 면밀히 관찰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충분히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처음 두 달 정도는 검은색 팬으로 드로잉만 하다가 요즘에는 색연필로 채색까지 하고 있다. 작은 집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는 스케치 노트와 72색 색연필 상자를 모셔놓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시간이 몹시 빨리 흐른다고 느끼는 걸 보면 그림일기는 어느새 놀이로 자리 잡고 있는 듯싶다.


동안거를 보내며 열여섯 권의 책을 읽었는데 중심이 되어준 주제는 심리학/죽음/수행이었다. 아무리 독서를 좋아하는 나도 전문도서를 너무 많이 읽으면 머리가 얼어버리는 경험을 한다. 이럴 때는 읽던 책을 잠시 접어두고 좋아하는 작가의 산문/소설/시를 읽으며 머리를 살살 녹여야 한다. 유난히 비가 자주 내린 이번 겨울에는 Sylvia Plath (1932-1963)의 글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실비아의 글을 만나면 전혜린 (1934-1965) 작가가 떠오른다.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졌다면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두 여인이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문학과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결혼과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를 맘껏 쏟아내며, 허물없이 수다 삼매에 빠진 모습을 말이다. 


이곳에 이사오기 전 우리 집 정원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듬해에 심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름이 깊어질 무렵 새벽에 명상을 마치고 이슬이 촘촘히 내려앉은 잔디밭을 지나, 뒤뜰 언덕의 돌계단을 오르면, 늠름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무화과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빚은 하얀 도자기 국그릇에 토실토실한 무화과 열매를 소복하게 담아 오는 기분은 참으로 뿌듯했다. 그렇게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도 다음 날 아침에는 새롭게 무르익은 무화과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는 것이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화과나무를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이 있다. 한편 실비아의 글을 통해 만난 무화과나무는 또 다른 촉감과 인상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Fig Tree


I saw my life branching out before me like the green fig tree in the story. From the tip of every branch, like a fat purple fig, a wonderful future beckoned and winked. One fig was a husband and a happy home and children, and another fig was a famous poet and another fig was a brilliant professor, and another fig was Ee Gee, the amazing editor, and another fig was Europe and Africa and South America, and another fig was Constantin and Socrates and Attila and a pack of other lovers with queer names and offbeat professions, and another fig was an Olympic lady crew champion, and beyond and above these figs were many more figs I couldn't quite make out. I saw myself sitting in the crotch of this fig tree, starving to death, just because I couldn't make up my mind which of the figs I would choose. I wanted each and every one of them, but choosing one meant losing all the rest, and, as I sat there, unable to decide, the figs began to wrinkle and go black, and, one by one, they plopped to the ground at my feet.


내 인생이 소설에 나오는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가지 끝마다 매달린 탐스러운 무화과는 멋진 미래를 향해 손짓하고 윙크를 보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이며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고, 어떤 것은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 어떤 것은 뛰어난 교수였다. 훌륭한 편집자라는 무화과도 있었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인 무화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콘스탄틴, 소크라테스, 아틸라 등 이상한 이름과 엉뚱한 직업을 가진 연인이었다. 올림픽 여자 조정 챔피언인 무화과도 있었고, 이런 것들 위에는 내가 이해 못하는 무화과가 더 많이 있었다. 무화과나무의 갈라진 자리에 앉아, 어느 열매를 딸지 못 정해서 배를 곯는 내가 보였다.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 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경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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