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 보내는 편지
그리운 할머니,
호숫가를 따라 촘촘히 서있는 라일락이 연한 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요. 향기로운 계절에 맞이하는 할머니의 아흔다섯 번째 생신을 축하드려요. 저는 며칠 전 고수리 작가의 판타지 소설 <까멜리아 싸롱>을 읽었는데, 할머니께 지오반니 스감바티 Giovanni Sgambati (1841-1914)의 음반을 들려드리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지금 그의 잔잔한 피아노 곡을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어요. 할머니, 오늘은 제가 몇 달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꿈이 너무 생생해서 새벽에 울면서 잠이 깼거든요. 그때 일어나서 핸드폰에 기억나는 대로 적어 둔 메모도 읽어드릴게요.
할머니의 임종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 꿈을 꾸었다. 수화기 너머로 친구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할 때마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고드름처럼 얼어 내 입에서 얼음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거리에서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할머니가 주신 사진이랑 글을 가슴에 품고, 그걸 훔치려는 사람들에게 울며불며 하소연하며 온 힘으로 맞섰고, 결국은 모두 끝까지 지켜냈다. 감사하게도 주변에 서있던 몇몇 좋은 분들이 할머니의 유품을 안 뺏기도록 도외주셨다.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 할머니께서 언덕에 앉아 말씀하셨다. “할미는 너를 보고만 있어도 따숩다.”
할머니,
이 꿈은 친구로부터 할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는 장면, 어렵게 할머니의 유품을 지켜내는 장면, 할머니께서 저를 바라보며 "따숩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전개돼요. 특히 꿈의 첫머리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데, 가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가 싶더니, 제 눈물이 모두 고드름으로 변해, 아이스 디스팬서에서 자동으로 각얼음이 나오듯, 제 입에서 얼음이 계속 쏟아져 내렸어요. 그래서 꿈을 꾸면서도 사람이 너무 슬프면 가슴이 눈물을 얼릴 수 있다는 생각에 놀라웠어요. 그런데 할머니, 이렇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슬픔으로 시작한 꿈이 "할미는 너를 보고만 있어도 따숩다"라는 포근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제가 왜 이 꿈 이야기를 하냐며는요. 이번에 읽은 <까멜리아 싸롱>에서 우연히 '따숩다'라는 표현을 또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 대목을 읽는데 몇 달 전에 꾼 할머니 꿈이 떠올라서 목놓아 펑펑 울었어요. 그럼 발췌해서 읽어드릴게요.
"이불 폭닥 덮고서 이래 발 뻗고 누워 있으니까 세상 부러울 게 없네."
"복희야. 행복이 별거 없다. 따순 집에서 새끼랑 따순 밥 지어먹으면 그게 행복이지."
그러게, 엄마. 더는 바랄 게 없다. 손마디가 퉁퉁 부어 짤뚱하게 굵어진 엄마 손을 조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눈을 떴다. 엄마가 베란다를 향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뭐이 번쩍거려서 잘 수가 있나. 야야. 여기는 밤에 차들이 잠도 안 자고 돌아다니나."
"...... 그러게."
"다들 사는 게 힘들지"
복희야, 시간이 잘도 간다. 깜빡, 눈 감았다 뜨면은 세월이 휘 가버린다. 사는 게 힘들지. 힘들어도 복희야. 따순 데 맘 붙이고 살다 보면 또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 세상에 미운 것도 싫은 것도 섭섭한 것도 좀 깜박깜박, 까먹어 버리면서 니는 그래 살아라.
둥그런 엄마의 등이 말했다. 무슨 다섯 살배기가 노인네처럼 말하는 것 같네. 몽롱한 정신에 엄마의 뒷모습이 신기루처럼 흐려졌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엄마는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렀다. 엄마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았다. 밥만 잘 먹던 양반이 하룻밤 새 이리 가버리다니. 너무 거짓말 같아서 믿기지 않았다. 이게 진짜라면, 인생이 참으로 같잖았다.
할머니,
올해 5월이면 15주기를 맞이하게 돼요.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매끄러운 할머니의 얼굴을 만져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할머니 냄새를 맡지 못한 십오 년이라는 세월을 저는 어떻게 살아냈을까요? 뒤돌아보면 몇 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고, 몇 년은 견딜만했고, 또 몇 년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 같아요. 저는 그동안 할머니의 삶을 진심으로 헤아리고, 할머니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는 애도의 시간을 보내온 걸까요?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할머니도 15년 전에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자리한 기묘한 다방, 까멜리아 싸롱'에서 49일을 보내셨나요?
꿈에서 할머니는 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숩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할머니를 떠올리면 온몸이 따스해져요. 이 생에 할머니의 손녀로 태어날 수 있었던 점, 가까이서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점, 할머니의 자애로움 속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던 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할머니가 계셔서 제 인생은 더욱 빛나고 아름다웠어요. 15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며, 할머니를 향한 제 마음과 닮은 고운 우리말도 만났어요. '윤슬: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참 예쁘죠? 오늘, 소중한 우리 할머니의 아흔다섯 번째 생신을 맞아, 달항아리 같은 할머니의 찻잔에 구수한 호지차를 올려드렸어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제가 할머니께 따스한 햇살이 되어드릴게요.
할머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요.
2024년 3월 4일 (음력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