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랄라에게 21화

랄라는 열여덟 살

고교 졸업 - 대학 입학

by Rainsonata

사랑하는 랄라에게,


푸르른 하늘이 시원한 가을 아침이구나. 랄라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우리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엄마는 몹시 신비롭고 감사하단다. 뒤돌아보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는 지난날도, 우리 랄라와 함께한 시간만큼은 엄마 가슴에 생생하게 기억되어 있단다. 우리가 서로를 추억할 수 있는 사진이 많다는 것도, 함께 주고받은 글과 편지가 많다는 것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치는구나.


랄라가 엄마를 찾아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엄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너에게 편지를 썼고, 우리 랄라가 태어나서 한 해 한 해 성장해가는 동안, 엄마는 간절한 마음으로 너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편지를 썼단다. 유치원에 입학하고 아빠 손을 잡고 등원 길에 나선 너의 작은 손에는 귀여운 Dora 도시락 가방이 들려있었지. 엄마는 우리 랄라가 처음 등원하던 날, 노란색 튤립 꽃 메모지에 정성껏 또박또박 “I love you”라고 적어 보냈지. 그때는 랄라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았거든. 그렇게 시작한 엄마의 도시락 편지는 랄라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올해 이삿짐을 꾸리다 랄라가 모아둔 도시락 편지 상자를 발견하고 엄마는 혼자 울컥했단다.


얼마 전, 랄라가 대학 의료보험에 가입하면서,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를 가족보험에서 제명하는 신청을 해야 했었단다. 이제 단독 의료보험 카드를 갖게 된 랄라를 보면서 기특하고 다행스러우면서도, 이렇게 하나씩 랄라와 엄마를 이어주던 것들이 서서히 정리되어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단다. 지금까지 감기를 앓거나 놀다가 다치는 일이 있었던 걸 제외하고는, 엄마 아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일로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던 일 없이, 무탈하게 열여덟 해를 우리 곁에 있어 줘서 고맙구나.


랄라야,


너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 있는 2020년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온 세계 사람의 가슴에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삶에 대한 큰 가르침을 받은 한 해로 기억되리라 믿는다.


2월의 첫날, 엄마와 랄라는 Prom 드레스 쇼핑을 갔었지. 그날은 겨울 햇살이 맑았던 토요일이었어. 랄라는 상기된 얼굴로 드레스를 입어볼 수 있는 순서가 적힌 종이를 들고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 깊은 포도주 색상의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드레스를 선택한 랄라는 계산대에서 엄마 얼굴 한 번 보고,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를 한 번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단다. 어떤 구두를 장만할까, 어떤 액세서리가 어울릴까, 머리는 어떻게 하면 예쁠까, 너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재잘거렸고, 엄마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하자고 말했지. 햇살은 여전히 눈부셨고, 엄마는 랄라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남자 친구와 함께 우리 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순간을 그리며, 그날도 오늘처럼 맑은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빌었단다.


그런데 2월 중순부터 우한 바이러스라고 불리던 바이러스에게 COVID-19라는 공식 명칭이 생기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 바이러스를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어. 하지만 2월만 해도 우리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지. 랄라는 여전히 학교에 가고,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친구들을 만나서 Prom과 졸업식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들떠있었어. 그랬던 너와 친구들의 대화에서 ‘may be’ ‘I hope’ ‘I am not sure’ ‘social distancing’ 같은 단어들이 더 많이 등장하게 되면서, 3월 초에는 이미 학교 수업은 비대면으로 전환되었어. 그러자 너는 조금 일찍 시작하는 봄방학 같은 거라면서, 정부 지침대로 당분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잘 지키고, 자가 격리를 엄격하게 하면 졸업생을 위한 학교 행사도 일정대로 진행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모두 잘 되면 계획대로 Prom 에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랄라의 심정을 엄마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어.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매일 아침 기도했단다. 조금이라도 너의 소망에 마음을 보태고 싶었거든.


3월부터 랄라와 친구들은 정말 열심히 안전수칙을 지키며 모든 사교활동을 접고 집콕을 시작했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주어진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네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엄마 가슴은 아팠단다. 그 무렵 이미 온 세계는 COVID-19로부터 잠식당하고 있었고, 조금 더 시간이 흘러 4월 중순이 다가오자 랄라가 말했어. “엄마 난 친한 친구들이랑 Zoom Prom을 할 거예요. 학교에서 Prom을 한다고 해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친구들의 계획이 모두 무산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는 화상으로 드레스를 입고 만나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음악도 들으며 우리만의 파티를 즐길 거예요.” 이런 순간에도 랄라의 유연한 사고와 긍정의 힘은 빛이 났어. 그런 랄라가 무척 고맙고 자랑스러웠다는 말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꼭 해주고 싶구나.


5월에는 랄라의 졸업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COVID-19 감염자 수는 날이 갈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세를 보였고, 결국 학교에서도 5월 말 예정이었던 졸업식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방안과 7월 말로 미루자는 의견을 두고 고민에 빠졌어. 지난 4년간 랄라가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생활을 성실히 한 결과로 받게 되는 졸업장, 상장, 메달, 그 밖의 수많은 색상의 명예 코드도 결국은 커다란 종이봉투에 담겨 차창으로 전해지던 날, 너의 표정이 슬픔과 아쉬움을 넘어 허전하고 어이없어 보였던 것은 엄마의 착각이었을까? 엄마가 랄라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하는 편지를 쓰지 못했던 이유는, 하루하루 급변하는 상황에서 랄라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서였어. 그래서 오늘 쓰는 이 편지에 너의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도 꼭 전하고 싶구나.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우등생이 되는 것보다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쌓으면서 후회 없는 십 대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던 랄라였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캘리포니아대학 입학을 목표로 너는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 랄라가 꼼꼼하게 학교 성적과 과외 활동 시간표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엄마는 마음이 짠하면서도 이렇게 굳은 의지라면 반드시 랄라 스스로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제야 엄마는 깨달았어. 지난 십 년간 무한 반복된 “우리 언제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살 수 있어요?”라는 너의 질문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랄라야, 미안해. 엄마랑 아빠가 우리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느냐고 너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했어.


우리 랄라는 ‘캘리포니아의 꿈’을 품고 성실히 입시 준비를 했고, 드디어 올해 3월 그토록 원하던 합격통지서를 받았어. 정말 감사하고 기쁜 순간이었지. 랄라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며 기뻐하시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잊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길 바란다. 다음 날 새벽에 한국으로부터 연락을 받기 전까지, 누구도 그 통화가 할아버지와 이 세상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슬프고 아픈 봄을 지내야 했어. 그래도 시간은 흐르더구나. 이곳에서 더운 여름을 보내고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하는 지금, 랄라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새로운 친구들과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 엄마는 요즘 네가 이루어낸 크고 작은 결실을 바라보며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의 참뜻을 가슴에 새긴다.


18년 전 우리 귀여운 랄라가 태어난 곳, 아빠의 응원 속에 혼자 두 발 자전거를 멋지게 타기 시작한 곳, 앙증맞은 교복을 입고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고, 놀이터와 공원에서 친구들과 맘껏 뛰어놀고, 밤이면 엄마 아빠와 별을 보며 수영을 즐긴 동화 같은 추억을 선물해 준 곳, 그리고 지금까지도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캘리포니아. 이제 우리는 세월의 강물을 돌고 돌아 또 한 번 서부로 향하는 길목에 가족 셋이 나란히 서 있게 되었구나. 물론 우리 사랑스러운 엘리와 루피도 함께 말이야. 랄라의 18세 생일에 맞춰 엄마 아빠가 준비한 캘리포니아 행 비행기표가 너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해 주길 바란다.


랄라야. 너를 향한 엄마의 사랑에도 배려와 책임이 따랐듯이, 앞으로 네가 펼쳐갈 인생의 모든 선택에는 책임과 수고가 따른다는 것을 배우기 바란다. 너는 어려서부터 “난 내가 좋아”라고 말하는 재미있는 아이였단다. 엄마 아빠가 가르쳐 주지도 않아도, 랄라는 자신을 사랑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갔지. 우리 랄라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엄마에게는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었고, 넌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끼고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게 가르쳐준 훌륭한 스승이었어.


아가야. 너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른이 되길 바란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각자 마음의 그릇을 넓히고, 모난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어 깊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가는 연습을 하는 거란다. 이 경험이 너를 조화롭고 평온한 길로 인도해 줄 거야. 이제 엄마는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서 랄라를 지지하며 바라보려고 해. 소중하고 귀한 우리 아가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이 세상은 너를 사랑한단다.


“I LOVE YOU”


2020. 10. 30.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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