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by Rainsonata

2013년 1월 11일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저물어가는 한 해의 기록이 담긴 다이어리를 훑어보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하지만 올 연말에는 너무 혹독한 감기몸살을 앓았던 터라, 습관처럼 해오던 일들도 자꾸 뒤로 뒤로 미루어졌다. 랄라의 개학과 함께, 나만의 시간이 허락되었고, 하나둘씩 밀린 주변정리를 찬찬히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년 한 해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분들을 메모해 둔 글 모음 사이에서, 시원한 장맛비 쏟아지던 여름날 혼자 버스 안에서 써 내려간 편지가 눈에 띄었다. 기록의 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아프면 아픈데로, 기쁘면 기쁜데로, 그리우면 그리운 데로 그 당시밖에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을 글로 남겨놓으면,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아름다운 여행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운 할머니,


지금 서울은 비가 내리고 있어요. 그리고 너무 감사할 일이 있어요. 제가 공항버스를 타면서 정거장 벤치에 배낭을 놔두고 왔는데, 다행히도 안내하시는 아저씨께서 제 가방을 맡아주고 계셨어요. 일기장이랑 카메라까지 들어 있어서 몹시 당혹스럽고 걱정이 됐는데, 정말 감사할 일이죠.


덜렁이 손녀에게 할머니께서 여행 잘 다녀왔다고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옛날에는 어디 다녀오면, 늘 할머니께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많이 슬퍼요. 그래도 이번 일로 비 내리는 날 오후, 버스 안에서 할머니께 편지를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할머니도 좋죠? 한국에 도착한 이후로 할머니랑 자기 전에 이야기 나눌 틈이 나지 않아서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는데 잘됬어요. 이렇게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할머니, 중국의 만리장성을 할머니께서 보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상상해 봐요. 여행지에서 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던 할머니 모습이 떠올라서 여행하는 내내 많이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께서는 아무래도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처럼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눈에 익은 곳들을 좋아하셨을 텐데…


할머니, 요즘 저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할머니께서도 제가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시죠? 저도 흐뭇해요. 책을 읽기만 하고 일상에 적용하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단지 머리의 지식창고에 물건만 가득 쌓이는 것이지, 제 삶의 질이 좋아지지도 나은 사람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어요. 그래서 좋은 말씀은 마음에 새기고 따라 해 보려고요.


이렇게 비 오는 날 할머니랑 같이 커피 마시면서 고스톱이나 쳤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전 지금도 할머니께서 허리가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평소 그렇게 재미있어하시던 고스톱도 마다하셨던 그날의 표정이 생생해요. 할머니께서 얼마나 몸이 힘드셨으면 밤새 치고 싶으시다던 고스톱도 거절하셨을까.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연속극 보시는 시간마저도 괴로워하셨을까. 할머니, 지금은 약 안 드셔도 되고, 병원에서 고통스러운 내시경 검사 안 하셔도 되고, 잠 안 오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지 않으셔도 되죠?


할머니, 제가 곁에 없다고 너무 적적해하지 마시고, 우리의 지난날 추억도 더듬어 보시고, 편안히 잠도 주무시고, 평소에 좋아하시던 꽃도 가꾸시면서 여여하게 지내고 계세요. 제가 남은 시간 열심히 살다가 만나러 갈게요. 우리 이쁜이 할머니, 사람의 인연이란 또다시 만나고 조화로워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떨어지는 빗방울만큼, 할머니 생각이 가득한 오늘이네요.


할머니의 끝이 없는 사랑에 감사드리며…


2012년 7월 3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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