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

베란다에 놓인 세탁기는 공평하게 얼어붙는구나

by 베로니카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오래된 관사지만 아파트는 아파트지. 그래서 약간 방심한 것도 있다. 친정집 세탁기가 얼어버렸다고 어제 자매들이 떠들고 있을 때도 나는 괜찮을 줄 알고 세탁기를 방치했다. 베란다가 제 역할을 다 해 주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오늘, 꼬마의 낮잠이불을 세탁하려고 세탁기 돌렸다. 아무 생각 없이 세탁 종료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종료음이 들리지를 않는 거다. 귀찮은 나는 베란다 문을 열고 살펴봤다가 IE라는 정체불명의 알파벳을 마주했다.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한 나는 세탁기 뚜껑을 열었고, 나는 자취 인생 17년 만에 베란다가 타의로 물바다가 되는 상황을 경험했다.


오후 여섯 시부터 약 두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조치는 다 취했다. 물론 엘지 모바일에서 친절하게 알려주는 대로. 하지만 점점 저녁이 되어오고, IE, OE, FF의 늪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며 냉수가 나오게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탈수는 실패. 결국 점점 밤이 되면서 다시 호스마저 얼어버렸다. 일단 세탁물은 다 꺼내놨으니 그게 얼어 터지 든 말든 베란다에 그냥 방치해버리고 나는 한기를 느끼며 거실로 돌아와 테라플루를 한잔 타 마셨다. 곧 졸릴 예정이다.


롱 패딩을 산 것은 근래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다. 작년에는 경량 패딩과 코트로 어찌어찌 잘 버텼다. 그냥 별로 생각이 없는 상태로 겨울을 났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런데 올해는 정말 롱 패딩 말고는 달리 입을 수 있는 옷이 없다. 속에는 남편이 사놓은 맨투맨을 뺏어서 받쳐 입는다. 그리고 할인할 때 사 두었던 기모 와이드 팬츠가 한 벌 있다. 그걸 매일 돌려서 입고 있다. 기모 아니고는 달리 입을 수 있는 하의가 없다. 그 정도로 대단한 추위다.


이 추위가 개그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지. "아이~ 추워, 영하 십팔도!" 이런 언제 적인지 모르는 그런 아재 개그 말이다. 상상도 안 되는 영하 십 팔도를 봄가을 환절기에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내 모습을 반성한다. 그 정도로 영하 십 팔도는 살벌하다. 롱 패딩 말고는 다른 패션을 생각할 수 없으며 운동화가 너무너무 추워서 패션 테러리스트를 감수하고서라도 바지에 꿋꿋이 털부츠를 낑겨신는다. 추위를 탈 덩치는 아닌데, 내가 이런 상태가 바로 영하 이십 도다.


영하 이십 도는 정말 살벌하다. 아침에 출근하려면 무조건 비탈을 내려가야 한다. 밤새 경비아저씨가 비탈에 떨어지는 눈을 계속 치우셨는지 도로는 무탈하다. 그래도 미끌거려서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며칠 전에는 밤에 차를 끌고 이동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집에 있어서 눈이 오는지도 몰랐다. 무방비 상태로 나갔다. 이미 차 위에 눈이 몇 센티미터는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 대충 앞유리만 치우고 벌벌 떨면서 시골길을 기어가듯이 운전해갔다. 다시 비탈길을 올라오는데 아저씨는 계속 눈을 치우고 있었고, 나는 내 차에서 처음으로 눈길 미끄럼 방지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차 내부가 철컹하더니 뭔가 묵직한 느낌으로 바퀴가 굴러가는 거다. 어른들의 눈 오는 풍경은 거의 이러하다.


우리 집에서 단 한 사람, 우리 꼬마만 눈사람 만들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런데 나가 놀려면 그것도 어지간해야지. 영하 20도에 눈사람 만들러 나가기에는 리스크가 조금 크지 않은가? 베란다 문만 열어도 칼바람이 쌩쌩 들어오니 나가노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며칠 전 처음 눈이 쏟아질 때는 꼬마가 정말 신이 났는데 칼바람을며 칠 경험하고 나니 나가자는 이야기는 안 한다. 이 정도로 살벌하다. 꼬마가 나가자는 말을 안 하는 추위. 영하 이십도. 그 와중에 건조기가 실내에 들어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사를 가면 다용도실에 넣으려고 생각하는데 거기는 괜, 괜찮겠지? 베란다 안쪽에 성에 안 끼겠지? 엊그제 점검차 다녀왔는데 실내 온도가 20도라서 안심 또 안심이었다.


나야 한파를 이렇게 해프닝으로 적지만, 해프닝이 아닌 분들이 더 많을 거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한파 때문에 생겨난 분도 있을 거다.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뭔가를 수습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수요일쯤 영상 온도를 회복한다고 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모두가 다치는 일 없이 무사했으면 좋겠다.


일단 우리 꼬마는 내일 낮잠 없이 어린이집을 가야 하고, 나도 내가 좋아하는 뜨신 플리스 티셔츠를 입고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결론. 세탁기만 얼어붙어도 발을 동동 구르는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 세탁기를 녹여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를 보냈다. 보일러가 고장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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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만 이런 집에서 종종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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