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자 1.5년, 개신교 3년, 베로니카가 되었습니다.
저는 약 25년간 ‘공식적으로’ 불교신자였습니다. 원해서 가진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할머니가 절에 다니셔서”라는 기적의 논리에 의해 가정환경조사서에 집안의 종교를 ‘불교’라고 적어내곤 했습니다. 세배할 때 왼손이 위로 가는지 아래로 가는지도 몰랐고, 그 외의 불교 용어라곤 스님과 절 말고는 관심없던 어린이는 사실 집 앞 교회를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그 동네에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가고싶었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성경학교라는게 너무나도 궁금해서였죠. 여름방학의 무료한 어느날,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단체티를 맞춰입고 사탕이나 초코파이를 하나씩 입에 물고 나오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부러웠습다. 슬쩍 엄마에게 말을 꺼내봤지만 “거기 가면 돈내야 된다”며 딱 잘라 말하던 엄마.
솔직히 이름도 기억안나는 누군가를 따라서 교회를 몰래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은행교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만 모아놓고 교리를 했던 것 같은데, “나에겐 심판이 없네, 주의 피가 내 죄 가리네,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으나 나에겐 심판이 없네.”라는 찬송가를 어떤 아주머니가 율동을 섞어 알려주셨어요. 어린 저는 이런 무서운 노래를 율동을 섞어서 한다는게 좀 이상했습니다. 포기가 빠른 저는 “역시 엄마 말을 잘 들어야겠다” 생각하며 저의 하루짜리 종교 생활은 종료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불교신자일 수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근처에 사는 셋째외숙모가 포교원 신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집 근처에는 작은엄마네, 막내고모네, 막내외삼촌, 셋째외삼촌 등이 모여살았습니다. 집성촌은 아니었지만. 왜이리 좁디 좁은 우리집에는 사람이 늘 많이 오고갔는지 모르겠네요. 극 내향형인 저에겐 꽤나 어려운 집안 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셋째외숙모를 통해 산속에 있는 절 말고도 교회마냥 일요일에 가서 법회를 드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 넘어 역삼역에 내려 조금 걸어가면 있는 강남포교원이라는 곳이었어요. 동생들은 초등생일때부터 다녔습니다. 저는 관심도 없었고, 108배라거나 하는 불교식 종교행위에 어쩐지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엄마 말대로 저는 “꽤나 까다롭고 키우기 어려운 딸”이어서 종교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불교신자였습니다.
‘공식적인 불교신자’가 포교원에 처음 가게 된 것은 첫 임용시험에 똑 떨어지고 난 스물 네살때였습니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부처님께 기도해서 삼수를 막아보자’는 심산이었죠. 그렇게 10년정도 짬이 찬 동생들을 따라 역삼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으니 과연 삼층짜리 작은 건물이 있었습니다(사실은 꽤 컸는데 그땐 작아보였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있었고, 법회라는 걸 드렸고, 식사를 했고, 친교활동을 하고 헤어지는 그 평범한 종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도 약간의 청년들을 알게되고, 쭈뼛쭈뼛거리다가 예비 초등교사라는 이유로 친동생이 맡아하던 어린이부 간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교리교사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가르쳐주는 일이구나 했지만, 실은 법회에 들어가신 부모님의 자녀들을 3층 소법당에서 돌봐주는 일이었어요. 일찌감치 돌봄업무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그 일을 하고, 재수생활, 기간제교사일을 병행했습니다.
종교활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생각보다 나의 심신을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연등도 만들어보고, 달아보고, 아이들과 캠프를 두 번정도 더 했습니다. 다시 본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멀리 떠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간사 일을 마무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에겐 두가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첫째,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면 임용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지, 라는 소망, 둘째, 108배를 해도 알이 배기지 않을 정도의 괜찮은 젊음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어요.
그렇게 제가 일하는 지역에서 살게되면서 몇 년 정도는 속세(?)에 물들어 살았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느라 크게 종교활동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도 없었고요. 그러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남편도 교회를 다닌적이 있다고 했고, 마침 여러 가지 계기로 좋은 동료 선생님을 따라 교회에 가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CCM을 본의아니게 많이 알게 되었던 것이 참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생활성가라고 해서 성당에서도 공용으로 부르는 노래가 참 많더라고요.
그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던 저는 지금은 ‘베로니카 자매님’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나기도 전부터 지켜보시다가 때가 될 때까지 제 그릇을 빚으셨던 성령님이 늘 함께이셨겠죠. 실제로 1.5년동안 포교원을 다닌게 전부인 ‘공식적인 불교신자’는 태어난 지 33년 만에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당을 다닙니다. 물론, 이 글을 쓰기 전에 남편과 투닥거렸고, 자녀에게 잔소리하는 평범한 아줌마입니다만 조금이라도 어제보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불교는 수행을 강조해서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좋은 가르침이에요. 하지만 하느님은 저의 성품을 저보다 더 잘 아시나봐요. 영 게으른 저는 하느님께서 “베로니카야, 이렇게 살아보지 않을래?” 라고 하시는 따스한 음성에 따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사는게 마음 편하네요. 모두, 평화를 빕니다.
2024.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