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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데려다준 시절

비가 데려다준 어린 시절

by 봄비

비 오는 날 어린 나는 숙모를 따라 서울나들이를 갔다. 피아노 학원을 하던 숙모도 나만 예뻐하여 나만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고, 나는 젊은 숙모를 김선생님이라 부르며 숙모를 사랑했다. 숙모는 은색 반짝이는 풍선을 사주셨다. 나만 데리고 간 숙모, 나만 풍선을 사주신 숙모. 샘 많은 사촌 언니는 그 풍선을 기어이 터뜨렸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날 기억이 너무 오래 남아있다. 마음의 병으로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숙모가, 나를 사랑해 주던 숙모가 비 오는 날이면 그리워진다. 이제는 젊지 않은 숙모에게 은색 풍선을 사드린다고 행복해하실까.


비 오던 날. 또 어린 나는 포항의 누군가의 집에 엄마를 따라갔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린 나는 낯선 시골 동네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빗물을 머금은 채송화며 이름 모를 풀들을 들여다봤던 기억. 그 집의 계단과 채송화 꽃밭, 비에 젖은 포항의 낮은 산자락이 지금도 생각난다. 비 오는 시골 풍경을 즐길 줄 아는 어린 나. 대여섯 살 쯤된 아이는 혼자 우산을 받쳐 쓰고 무슨 생각을 하며 쪼그려 앉아 있었을까.


어릴 적 살던 우리 집 대문간엔 작은 지붕이 있었고 그 지붕아래 비를 피할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앞집 친구랑 우산 두 개를 펼쳐 그 공간에 대문을 만든다. 그 우산 대문 뒤로 생긴 은밀한 공간 속에서 속닥거리며 비밀 얘기를 만들어냈다. 그 자리에 없던 동네 여동생 흉을 봤던 것도 같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지어내며 공작을 펼쳤다. 사방치기를 할 때 쓰던 석필로 벽에다 연신이 바보! 이렇게 낙서도 하면서. 돌멩이며 목련꽃 이파리로 소꿉놀이도 한 판. 세워 둔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그때도 좋아했을까. 그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을까.


세상이 색종이처럼 가을빛으로 물든 어느 비 오는 날. 누구와 함께 놀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비가 오니 은행잎들이 떨어진다. 비에 젖은 은행잎들은 유난히도 노란색. 어린 나는 골고루 노랗게 예쁘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 모으고 다녔다. 온통 세상이 노란색으로 기억되는 그날, 비를 쫄딱 맞으면서 행복했던 기억. 무슨 보물처럼 모은, 비에 젖은 은행잎을 집으로 가져간 나. 엄마에게 혼이 났겠지. 혼난 기억은 사라지고, 온통 노란색 세상 속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헤매 다니던 기억만 남는다.


아빠를 닮아 꽃을 좋아했던 나. 아빠를 따라다니다 만나는 꽃들은 다 내 꽃이 된다. 이름을 알고 나면 사랑이 시작되니까. 어릴 적 우리 집 앞 공터에 내 꽃밭을 만들었다. 분꽃씨앗, 아주까리 씨앗, 해바라기 씨앗, 봉선화 씨앗. 동네에서 만나는 식물들의 씨앗을 모으는 재미. 그 씨앗들로 내 꽃밭을 만들었다. 비가 너무도 많이 오던 어느 날. 꽃밭이 무사할까? 우산을 받쳐 들고 꽃들이 넘어지지 않게 흙을 북돋워 줬다. 또 나는 다 젖어서 집에 들어갔겠지.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그 아름다운 동요도 비 오는 날이면 생각이 난다.


낭만과 무모함 사이의 어느 지점. 우리 아빠는 그런 분이다. 비 오는 날이면 드라이브를 갔다. 엄마가 빗길에 위험하다고 해도 아빠랑 나랑은 마음이 맞는다. 팔당댐에 수문을 열었을 거라고. 수문을 열어 무섭도록 쏟아지는 물구경을 가곤 했다. 어린 나는 그 무서운 기세의 물을 보며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저 물속에 있으면 죽겠지?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도 수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물폭탄 구경이 좋았다. 이제는 운전을 못하시는 아빠를 모시고 어느 비 오는 날 팔당댐을 찾아갔다. 우리가 물구경한다고 서 있던 그곳에 이제는 갈 수가 없었다. 아빠랑 함께여서 그 많고도 무서운 물구경이 좋았던 거지.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비와의 친분을 맺어서일까. 6월 끝자락에 비의 디엔에이를 묻혀서 태어나서일까.


새벽부터 들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일요일인데.. 내일 출근인데 더 자야지 하면서도 잠은 오지 않는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살지 않으니 집에서 비를 느끼기 어렵다. 오롯이 내 동굴이 되어주는 차 안에 앉아 비를 느낀다. 애잔한 목소리의 끝판왕, 고유진의 노래를 듣는다. 차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함께. 나는 비가 오면 서정주 시인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이 떠오른다.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나는 내리는 눈발 속에서가 아니라 떨어지는 빗소리에서 '괜, 찬, 타,'가 떠오르는 사람.






어른이 되고 난 후 비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름답기만 하지 않은 추억들이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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