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의 추억에 잠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 계절을 맞이하는 드라이브길, 낯선 도시의 여행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한다.
허름한 해물칼국수집 앞에 앞치마를 입고 부채를 부치고 앉아 있는 주인 아주머니는 지금 무슨 걱정을 하고 있을까. 너무 더운 이 여름, 뜨거운 칼국수를 찾는 손님이 없어서 가겟세를 걱정하고 앉아 있는 걸까. 말썽피우는 자식놈, 언제 사람될 지 한탄하고 있는걸까.
저 나즈막한 파란지붕 집 사람들은 언제부터 저 자리에 터를 잡고 살고 있을까. 나라면 집 마당에 목련나무 한그루 심었을텐데, 흙먼지가 싫어서일까? 마당을 다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네.
바닷가 한적한 동네의 한 구석. 화단이랄 것도 없는 저 곳에 분꽃이 있으니 화단같네. 노란색, 분홍색 분꽃을 심어놓은 사람은 누구일까. 어릴적 동네 공터에 분꽃을 심고 가꿨던 나. 그런데 지금은 분꽃 씨앗을 심어봐도 노란색 분꽃이 피어나지 않던데...
장터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비가 한바탕 세상을 씻어놓아 더 반짝이는 가을 어느 날. 용문 5일장을 혼자 들렀다. 날씨가 한 몫 거들어서 그럴까? 다른 장터에 비해 정갈하고 차분하다. 나는 이곳저곳 구석구석 쏘다니며 구경을 한다. 튀김 파는 아저씨의 정겨운 호객행위, 우리 새우는 다르다면서. 흘깃 바라본 아저씨는 참 소년같이 환하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 저곳 사진을 찍으니 지나가는 아저씨가 묻는다. 그렇게 찍어서 어디에 올리실라고? 아니요, 아이들 체험학습에 장보기 미션 목록 만들려구요. 아저씨는 실없이 묻고 또 실없이 웃어주신다. 내가 저 아저씨 아내였다면 분명 잔소리 한 번 했을텐데. 실없이 남한테 왜 그런 거 물어보냐고. 그래도 아저씨의 실없는 웃음이 정겨웠다. 이 장터엔 착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신이 났다.
나는 시골 동네의 장터에선 쇼핑중독자가 된다. 분명 우리 동네 마트에선 그렇지 않은데. 빻아놓은 곡식가루며 정갈하게 다듬은 야채들, 생전 먹지도 않는 칡즙이란 벌건 색의 글자는 왜 그렇게 정겨운지. 화려한 색깔의 잔 꽃무늬 잠옷 바지를 사고야 말 것 같은 나. 엄마라도 같이 왔으면 나를 말려줄텐데. 용문 5일장을 들렀던 그 날도 나는 소박하고 정겨운 구석구석을 한마리 하이에나처럼 침을 흘리며 헤매고 다녔다.
유난히도 하늘이 맑았다. 바람은 선선하고 장터는 적당히 소란스럽다. 나는 갑자기 왜 이렇게 행복한걸까. 하늘을 바라보니 이 곳 전봇대와 전선들도 아름답다. 장터 구석구석 간이 식탁에서 잔치국수를, 지글지글 막 부친 부추전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도 친해질 것 같다. 미쳤구나. 용문 장터에서 세포가 살아나 또 소소한 행복에 젖던 찰나.
갑자기 부쩍 늙어가는 아빠가 떠올랐다. 엄지발가락 긴 것도 아빠 닮은 나인지라 내가 좋아하는 많은 일들과 추억이 아빠와 겹쳐진다. 갑자기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장날이면 우리 동네 전통시장에 엄마 몰래 가시곤 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빠와 술냄새에도 취하는 엄마. 참 안 어울리는 부부다. 아빠는 엄마 몰래 혼자 장에 가서 싸구려 면도기며 향이 독한 스킨을 사오신다. 그러나 그 물건은 핑계일 뿐, 3,000원 짜리 막걸리 한 잔이면 부추를 무한리필해주는 장터 단골집을 가기 위한 핑계. 그렇게 엄마 몰래 혼자서 장터를 다녀오곤 하셨다.
어느 날 나는 엄마, 아빠를 모시고 함께 우리 동네 장터를 찾았다. 아빠는 엄마 눈치를 슬슬 본다. 엄마는 "마, 한 잔만 하소." 허락을 한다. 그렇게 우리 셋은 아빠의 단골 막걸리집에 갔다. 아빠가 막걸리 한 잔을 시키자 엄마는 어이없게도 자기가 부추전을 먹기 시작한다. 막걸리는 아빠, 부추전은 엄마. 주인 아저씨한테 걸리면 안되는 일이다. 주인의 셈법으로는 세 명이 와서 세 명의 입으로 부추전이 들어가면 세 잔의 막걸리 값 9,000원을 내야한다. 아저씨가 딴 데를 볼 때 아빠 입에도 내 입에도 부추전 한 점을 얼른 넣어주는 엄마. 그 후로 우리는 종종 장터의 그 집을 찾았다. 가끔은 엄마가 그 부추전 생각이 나는지 "막걸리 한 잔 하소." 먼저 권하기도 했다.
요즘 우리 아빠가 변했다.동네 장터에 혼자 가는 법도 없다. 엄마랑 나랑 같이 가던 장터 나들이도 뚝 끊어버리신 아빠. 다 귀찮아 지셨다고,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다고 하시는 아빠. 엄마 몰래 혼자서 막걸리 먹고도 안 먹은 척, 다리에 힘이 있는 척 뻣뻣하게 들어오시던 그 시절이 얼마 전인데.
이 투명하고 빛나는 가을 하늘 아래, 울 아부지 생각에 갑자기 눈이 벌개진다. 먹이를 앞둔 하이에나처럼 장터를 기웃거리며 눈이 벌개 돌아다니던 나는 갑자기 슬쩍 눈물이 난다. 꽃무늬 잠옷 바지며 금박 입은 새우튀김이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서 올리실라구? 묻던 그 아저씨가 이번에는 왜 갑자기 울고 그러셔? 이럴까봐 나는 가방 속 썬글라스를 찾아 쓴다. 장터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썬글라스.
나는 아부지가 엄마 몰래 장터에 가면 좋겠다. 싸구려 향이 강한 스킨도 사오시고, 싸구려 벨트도 사오시고 그래서 엄마한테 푼돈 다 날리고 뭐하능교! 잔소리도 듣고 그랬으면 좋겠다.
아... 나는 조울증이거나 갱년기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