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아저씨의 낡은 지갑을 털었다
나는 오늘 누군가의 지갑을 털었다. 아, 잔잔하고 지적이며 고상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일기처럼 쓰고 편지처럼 닿다! 매거진 제목처럼. 일기를 쓴다. 나의 속물근성을 들여다보며. 또 닿지 않을 편지를 쓴다. 오늘 만난 아저씨께 미안한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서.
오늘,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 나는 루틴처럼 늘 가는 채소가게를 향한다. 세금도 안 내고, 현금으로만 계산하는 우리 동네 채소가게로. 9시 30분에 문 여는 이 가게, 오이 한 개도 1000원이 넘는 세상에, 오이 7개가 3000원. 이 가게를 알고 나선 큰 마트에서 채소를 살 수 없게 되었다. 길게 늘어선 줄,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한다. 나는 엄청 알뜰한 사람.
어렵사리 주차를 했다. 일주일치 장을 봐야 하니 어깨, 두 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어야 한다. 다행히 가게 가까운 곳에 자리를 발견하고 주차를 안전하게 한다. 아 그런데.. 중독성 있는 브런치스토리. 발행을 눌렀던 글에 알림음이 울린다, 강릉에 오는 단비 같은 알림음. 부지런히 가게로 향해야 했지만 나는 그 알림음을 듣고 움직일 수 없었다. 누가 내 글을 읽어주었을까. 그의 글도 따라가 읽어본다. 아,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작가님이 내 글을 읽어주다니. 감동하던 찰나.
쿵. 앞차가 후진하다 내 차를 들이받았다.
차를 받고도 나와보지 않는다. 얼른 차를 빼서 가려고 하는 듯. 내가 만약 차 안에 없었으면 그대로 차를 빼고 갈 태세였다. 니가 받은 차 안에 사람이 있다고, 나는 클락션을 울렸다. 그러자 앞차의 운전자 부부가 내렸다. 나는 나의 다섯 살 난, 주행거리 팔만의 내 차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되어주는, 나의 동굴이 되어주는 사랑하는 내 차.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듯했다. 범퍼에 보이는 작은 상처. 그런데 그 상처가 예전부터 있었는지 오늘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없었으면 그냥 도망갔을 것 같은 그 행태가 괘씸하여 괜히, 더 오래 더 차를 둘러보았다. 속도에 못 이겨 받혀 죽은 벌레의 잔해까지 손가락으로 괜히 짚어보며. 이게 댁 때문에 난 상처일 수도 있어요.. 라고 말하는 듯.
그러나 나는 맹세코 그리 물욕도, 야박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도망가려고 했던 그 행태가 괘씸해 시간을 끌었을 뿐. 나는 어느 타이밍에 내 차를 살피는 행위를 그만둘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됐다고, 괜찮다고... 그냥 가시라고 말하려던 찰나.
삼촌뻘 정도 될 듯한 운전자 아저씨가 반지갑을 확 열여 젖히며 말씀하신다. "제가 지금 가진 게 50,000원 밖에 없어서요. 요 정도 수리비 드리면 어떨까요?" 됐다고, 괜찮다고, 그냥 가시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지갑 속 50,000원을 보게 된 나. 나는 정말 맹세코 예전에 내 차를 뒤에서 받은 아저씨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보내드린 그런 사람이었다. 선한 끝은 있다면서, 너그럽고 선하게 살으라는 엄마의 세뇌 속에 반백 년을 살았던 나이다.
그런데 50,000원의 유혹에 굴복한 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저씨가 건네주는 그 돈 50,000원을 가만히 받아 쥔다. 뻘쭘한 나의 표정은 주말 나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마스크 속에 숨겨두었다.
그놈의 수리비가 오고 가고 한 뒤, 아저씨는 나에게 차를 뒤로 조금 빼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또 어떤 말도 없이 차를 뒤로 빼준다, 차 빼시기 편하도록 아주 넉넉하게 뒤로. 50,000원어치 넉넉하게 뒤로 차를 빼준다. 그 운전자 아저씨의 아내의 표정을 슬쩍 살피면서.
아.... 나는 차에 타자마자 후회했다. 부끄러웠다. 그 돈 얼마 더 있다고 내가 부자가 되나. 오늘, 2025년 9월 13일 토요일 아침. 나는 너무 부끄럽게 그 돈 50,000원을 슬그머니 받고 말았다.
그 아저씨의 아내의 눈치를 슬쩍 살폈던 나. 우리 아빠와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 표현을 빌리자면 젊은 아빠는 자잘한 '사고를 자주 치는' 분이셨다. 그런 자잘한 사고에 이어지는 지출. 아빠는 자주 엄마에게 들들 볶였다.
상상을 해본다. 엄마 아빠가 몇 푼 아껴보려고 싼 채소를 사러 장을 보러 나온다. 오이 3,000원어치만 사도 30분 넘게 기다리는 긴 계산 줄을 감내해 가며 장보기를 마친 엄마와 아빠. 잠시의 부주의로 남의 차를 받은 아빠. 차주의 선처가 내려지려는 찰나, 50,000원의 수리비를 먼저 제안한 마음 좋은 아빠. 몇 천 원 아끼려고 장 보러 나왔다가 예기치 않은 큰 지출을 목격하는 엄마. 아빠는 아마 오늘 엄마에게 들들 볶여 *깨자반이 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아저씨의 조금 낡고 텅 빈 지갑이 자꾸 떠오른다. 깨자반이 되고 있을 아빠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진다. 그 돈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토요일 내내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을 텐데. 평화로울 수 있었던 그 부부의 주말을 내가 망친 것 같은 기분.
그 아저씨의 50,000원으로 나는 부자도 되지 않았고, 공돈이 생겼다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브런치스토리를 살펴보다 생긴 일. 그러니 제일 먼저 든 생각. 아, 작가가 이래도 되나.
그런데 나는,
알뜰한 나는,
일 년에 내 돈 주고 치킨 사 먹는 일은
한 두 번밖에 없을 나는
50,000원어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오늘 치킨을 주문했다.
그 돈을 빨리 써서
찝찝한 마음을 없애려는 것인가.
아님 정말 나는 속물처럼
공돈이 반가웠던 것일까.
반성과 치킨의 난해한 관계는
무엇일까.
*깨자반이 되다 : 참깨가 깨자반이 되기 위해 겪는 고초를 사람에게 행하겠다는 우리 엄마의 잔혹한 표현. 참깨는 깨자반이 되기 위해 비벼지고, 씻겨지고, 껍질을 제거당하고, 볶아지는 고초를 겪는다.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실수를 하면 엄마는 늘, 아이고 깨자반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다!라고 표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