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비굴한 최후진술
이제 브런치 시작한 지 닷새 부족한 두 달. 내가 브런치 글터에서 자주 했던 말, 데스노트도 절절한 소망이 담긴 글, 신에게 가서 닿든, 그 당사자에게 가서 닿든.. 글이란 닿아야 한다는 말.
첫 글을 올리고 수시로 울리는 라이킷 알림음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발행을 섣불리 누를 나도, 그럴만한 타이밍도 아니었다. 그날 테니스장에서 선을 넘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한껏 받은 나는 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현실도피의 반항으로 첫 글을 올리고 만다.
브런치 신세계를 처음 맛본 나! 황홀했다. SNS도 안 하고, 블로그 글도 비공개, 게다가 까칠함의 극치인 나는 친구도 별로 없으니.. 브런치의 실시간 반응에 신세계를 영접한다. 라이킷 수 20이었던가? 대작가님들은 웃으실 숫자지만 난 20이 그리 큰 숫자인지 처음 알았다! 어머나, 첫 글인데.. 나 재능이 있는 거야? 하면서.
재능이 어디 가겠어? 아주 야무진 착각과 기대를 동반하여 다음 글을 야심 차게 올려본다. 아! 그러나 20이 언제부터 인류 최대의 숫자였던가. 재능은 개뿔. 이 사람의 첫 글이니 위로와 응원을 부탁한다는 브런치팀의 알림이 나 몰래 떴던 걸까? 오만가지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후, 내 글은 정말 찰나의 순간에 사라지는 백사장 모래알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갈피를 못 잡는다. 글의 발행을 누르고 브런치나우를 들여다본다. 방금 올렸는데 내 글은 아래로 아래로.. 잠시 후 내 글은 사라지고 만다! 누구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기도 전에.
식사 중이셨을까?
중요한 회의 중이셨을까?
아무도 모르게 내 글은 아래로 아래로, 심해 해양 생물이나 만날 그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연탄 위 쥐포처럼, 불판 위 쭈꾸미처럼
나도 쭈그러들다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현실자각의 순간
아! 내 글이 별로구나. 일천한 경험, 구차한 수식어.. 현타가 왔다. 다른 작가님들 글터를 방문하기 시작한다.
아~~ 이게 또 신세계. 분명 나는 글을 읽었는데, 대체 왜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지? 우리 반 아이들(초1) 수학문제 풀 때랑 똑같은 현상이 나에게 나타난다. 알맞은 것끼리 이어보시오 라고 하면 점들끼리 한 줄로 이어놓는 그런 정도의 문해력. 내가 그랬다. 오래오래 책과 담쌓고 살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눈과 귀, 심지어 코까지 닫고 살아서 이런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과 선문選文의 행렬...
이렇게 나는 또 신세계를 발견하여 내 어둠과 무지를 일깨워주시는 작가님들께 '라이킷 경의'를 표할 수밖에.
어쩜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셨을까, 감탄하며
나도 저런 기획을 했어야 했는데, 아쉬워하며
슬프고도 아픈 얘기를 이리 담담히, 공감하며
내 부족함을 한껏 깨닫게 해 주시네, 놀라며
간결함 속에 알맹이가 있구나, 부러워하며...
나는 브런치 세상 구경에 신이 나 멋진 글들에 나의 최대치 공손함을 담아 '예禮'를 다하고 다녔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내 낙서 같은 글에 그 경이로운 작가님들이 라이킷을 눌러주신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합리적인 의심
독자님들께서 왜 갑자기 배부른 투정이냐고 궁금해하실 즈음인 듯하다. 많은 작가님들의 응원과 격려 속에 푸성귀 가득한 나의 브런치에도 살짝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요즈음. 합리적인 의심이 스멀스멀, 봄날 아지랑이처럼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말 내 글이 좋아서 라이킷일까 하는 제법 합리적인 의심이.
20이란 숫자가 인류 최대 숫자인 줄 알았는데 오늘 53란 숫자가 내 앞에 놓여졌다. 행복해야 마땅한 오늘, 나는 이 숫자가 허망한 숫자일 수 있다는 현실자각을 하게 된다!
따끈따끈 방금 라이킷 눌러주신 작가님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라이킷 알림음 후, 쪼르르 달려가서
"진짜로 재밌으셔서 누르셨나요?"
"와닿는 뭔가가 있으셔서 누르셨나요?"
얼마나 경박하고 체신머리 없는 일인가.
오롯이 글 쓰는 일에 정진해야 할 작가가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진심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작가로서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했다는 것.
나의 진심 어린 경의의 표현에
품앗이처럼 되돌려주는 '라이킷 노동'일까 봐
나는 숫자가 많아져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그저 내 방문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봐.
속물근성의 발현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나를 좀 더 성장시킬 수도 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꼿꼿이 지키며 글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이끄는 성장의 동력.
그러나 글 자체의 힘에 대해 성찰하는 이 글을 쓰면서 또 전혀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얄팍하고 속물 같은 걱정이 발현되고야 마는 나.
이 글을 읽은 분들이 정말로 냉정해지면 어쩌지?
그래서, 진정 너의 '글 자체'를 평가해 주마! 이렇게 까다로운 잣대를 내 글에 들이대시면 어쩌지...
괜히 오두방정, 오지랖을 떨며 이 글을 올렸다가 나만 홀로 반가운 라이킷 알림음이 작동되지 않는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지면 어쩌지...
이런 부질없는 걱정을 오늘, 53이란 숫자 앞에서 하게 되었다.
이게 다 비구름이 보름달을 덮어버려서 이런 거다, 애꿎은 하늘 탓을 또 하고 있다.
비굴한 최후진술
나는 그저 작가라면 한 번쯤 해봄직한 성찰을 했다는 것.
굳이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잣대로 제 글을 평가하지 않으셔도 제 분수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
그러니 더도 덜도 말고 지금과 같은 관심은 필요하다는 것.
빈껍데기든 허망이든 간에 내 글이 소리 없이 사라지기 전 누군가에게 닿고 있음을 진정 감사히 생각하며 숨 쉬고 있다는 것.
#. 관련 글 : 찰나의 순간 사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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