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나,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끈. 평생 보장되는 안심보험!
어느 새벽,
바글바글 내 속에서 자라나는 말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소하고 부질없는 순간순간이
기억나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갈증 난 사람이 물 찾듯...
우리가 그 시절 그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오리의 무엇에 대해
이야기했는지가 왜 궁금한가.
나를 막막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창문 없는 방에 갇힌 느낌.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
무서워졌다.
넓은 이 세상 속에서
너를 어떻게 찾아....
핸드폰 속 연락처를 뒤진다.
아. 아직 여기 있구나.
그러다 또 무서워진다.
어느 날 갑자기 여기서도
너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면
나는 어떻게 대답을 들어.
묻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청승과 민폐를 끼치지 않을 거면서도
겁이 났다.
아, 편지를 써야겠어.
닿을 수 없을 편지라도
내가 자꾸만 숨이 안 쉬어지면
그땐 편지를 보낼 거야.
아무렴 니가 날 죽게 내버려 두겠니.
이렇게 나를 다독이니
마음이 잔잔해진다.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어쩌면 나의 고백이거나 소심한 외침 같은
그런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헤어지기로 결정한 뒤
아직은 어렸던 우리는 이상한 관계로 지냈다.
서로가 안쓰럽고 애틋하여 만나는 사이.
출장을 가는 그를 수원역에 데려다준다.
힘들어하던 그를 안아준다.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너는 내 옆에 있어야 돼
이렇게 말했던 나.
숨이 안 쉬어진다고
되돌릴 수 없냐고 말하던 K에게
깨진 유리를 어떻게 붙여 쓰니
매몰차게 말하기도 했던 나.
어느 날 회사 여직원 얘기를 꺼내는 K.
나 때문에,
다가온 사람을 밀어내지 말라고 말했다.
그 후, 우리의 이상한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한 나.
생일날 같이 있어주겠다는 K의 연락에
거절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일까.
어떤 여자의 손을 잡고 걷던 K를 우연히 만난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지만 그냥 지나쳤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별로 안 이쁘네. 이러면서.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내 옆에 있어야 돼.
나 때문에 다가온 사람 밀어내지 마.
깨진 유리를 어떻게 붙여쓰니.
모순된 말을 했던 나.
너는 그 여자 손을 잡았다.
두 가지 얘기는 그렇다 치고
내가 괜찮은지, 그래서 니가 가도 되는지
너는 묻지도 않고 다른 손을 잡았다.
지금에서야 그 생각이 들었다.
혼자 포항으로 여행을 다녀온 뒤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보험이 필요했다.
창문 없는 방에 갇힌 것처럼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을 걷는 것처럼
답답할 때
이 넓은 세상 속에서
너를 못 찾으면 어떡해.
못 찾는 것과 안 찾는 것은 다르단 말이야.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보험이 절실했다.
아직은 내 전화기에 남아있는 K에게
담담하고 건조하게
부탁을 했다.
다른 손을 잡고 있던 K를 마주친 그날 이후 처음으로.
20년 만에.
잘 지내지?
너무 뜬금없이 연락해서 당황스럽지...
며칠 전에 포항에 갔다 왔어.
여러 가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카톡에 아직 니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연락처가 바뀌면 알려는 줄래?
연락하지는 않을 거야.
그것도 모르고 살면 내 젊은 날과의
끈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K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난 K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보험을 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참아도 참아도
막막하고 답답한 이 감정이
또 불쑥 나타나면
나는 보험사를 찾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 보다 더 다행인 것.
만일의 돌발 사태가 없더라도
나를 평생 지켜줄 수 있는
보험 하나를 더 찾아냈다는 것.
여행 이후
나는 고요하고 깊은 물속으로 잠겨 들었지만
그러나 내 안은 고요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무성하게 자라는 여름 잡초처럼
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바글바글 자랐다.
이제 내 꽃밭을 정리하려고 한다.
내 안에 바글바글 자라는 말들을
꺼내보기로.
나의 30년을 지배했던 K와의 일들과 감정은
내가 쓰는 모든 글에 스며있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글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졌다.
나의 보험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돌발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보험사에 연락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지난 시간과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보장해 주고
앞으로의 시간에 나와 세상과의 끈을 이어주는...
이렇게 나는 두 가지 종류의 보험설계를
보험설계사도 없이
나 혼자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