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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함께

#3. 함께하니, 부럽더라

질투의 감정이 불타오르는...

by 봄비


질투

아늑하고 따뜻한 문장이다
붓처럼 섬세한 언어에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으로 펼쳐진다
마음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아늑해진다

작가의 시선이란 이런 것인가
참신하고 기발한 사유의 흐름들
같은 것을 바라보고 다른 것을 찾아낸다
낯설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서늘한 전율이 흐른다

참으로 산뜻하고 경쾌한 문체
내 일상에도 환한 햇살이 번져오는 기분
순식간에 문장을 읽고
순식간에 전해진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과 따스함이

이렇게 이렇게
글을 읽으며
질투를 한다

by 봄비






함께 하니, 부럽다


요즘 심리한스푼 작가님의 <질투, 밴댕이 소갈딱지의 심리학>이라는 브런치북을 읽고 있다. 작가님이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작가님이 소개한 에피소드들 하나하나가 다 내 얘기다. 밴댕이 소갈딱지가 바로 나였던 것.


그러나 작가님의 한 문장을 또 만난다.


감정은 적이 아니라 신호였다
질투 또한 마찬가지다
그건 미성숙의 징표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였다.



질투의 뿌리, 불안한 나의 마음


불안한 것이다 나는. 심리한스푼 작가님은 말한다. 질투의 뿌리를 파고들면 불안이 있다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우리 마음의 예보시스템이라고.


너무나 예쁜 연예인의 외모는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나의 세계와 연결고리가 없는 어떤 세상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내 옆의 사람,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 나와의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 질투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래, 그럼 나는 무엇이 불안한 것일까? 아.. 이 마음을 또 고백하면 너무 부끄러워지긴 하지만 솔직해지기로 한다. 글이라는 것은 솔직함이 생명이 아닌가. 교보문고의 화제의 신간은 나의 세계와 다른 '저 높은 곳'이라 치부하니 맘 편하고, 브런치 세상의 글들은 '내 옆에 있으니' 비교를 하게 되더라는 그 말이다. 함께 매거진 작가님들과의 소통을 하고 나니 그분들과 한껏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던 요즈음. 나는 그 작가님들의 글터를 방문하고 그분들의 삶의 순간들, 그 순간을 바라보는 시선들, 또 같은 것을 보더라도 글로 스며들도록 만드는 그 문장들... 그 모든 것들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그리고 너무 가까이 다가와 나는 그 작가님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 위의 시에서 밝혔듯이 나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며 그러그러한 대목에서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조금 순화하자면, 부러웠던 것.


질투라는 감정을 달래 보기로 한다. 질투는 새로운 자극이 있을 때 생기는 마음 아닌가. 새로운 자극과 고여있는 나를 비교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질투라는 감정을 잘 달래어 활용한다면 나는 성장을 위한 꿈틀거림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자, 이젠 질투를 넘어 나의 성찰의 시간.


나는 30년을 일기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 세상 돌아가는 뉴스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했지만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새로운 어떤 것도 해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30년을 보낸 내가 그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매거진 작가님들을 부러워하다니. 가당찮은 일이다.


어떤 분은 하루 10시간도 글쓰기를 하신다 하였고, 어릴 때부터 상상하는 습관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된다는 분, 신춘문예에 도전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 글쓰기 위한 시간을 위해 한 시간도 쪼개어 쓰신다는 분... 이런 열정과 노력, 꿈과 도전을 가지신 작가님들의 지금을 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질투의 감정을 승화해 본다. 나는 지금 함께하는 작가님들의 일상과 글을 만나게 되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이 찌릿찌릿하게 전해져 온다. 이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의 시간들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는 결국 나의 몫이다.


가당찮은 질투나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싶지도 않다. 실현가능성이 더 적어질 것 같으니. 그저 소박한 계획을 세워보기로 한다.


숙제처럼 글을 쓰지 않겠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연재일이 닥쳐오는 브런치북의 시스템은 적합하지 않았다. 얼마 전 나는 <나의 시간을 거꾸로 흐른다>라는 시를 썼다. 글쓰기와 인생의 시간이 주객전도되는 나의 시간에 관한 글. 얼마나 답답했으면 시를 썼겠는가.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념이 떠오르면 글이 되어야 하는 것. 그러나 나는 연재일에 쫓겨 억지로 상념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겠다. 글쓰기는 누가 나에게 시키는 숙제가 아니다. 내가 나의 속도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가면 되는 일,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읽어야겠다. 어쩌면 말하기의 기본은 경청일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기본은 읽기일 수도. 다른 사람의 사유의 시간과 결을 따라가 보아야 한다. 읽지 않고 쓰려고 하는 것은 욕심. 나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그 한계를 인식조차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많이 읽고 많이 느끼다 보면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것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체형과 상관없이 저 사람이 입은 코트를 입고 싶어 한다면 패션의 재앙이 될지도 모를 일.


나에게도 많은 (나 스스로는 너무도 많다고 생각하는) 구독자가 생겼으며 나의 관심작가도 많아졌다. 나는 시간에 쫓기고 있으며 그 모든 글들을 과연 진정성 있게 탐독하고 음미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어떤 글에서는 메모라도 해놓고 싶은 구절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읽어야 할 글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어떤 글하나 음미하며 나의 세계로 옮겨와 봤는지, 이 부분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내 결을 찾아야겠다. 나만의 색깔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푹 빠져 본 적이 있던가, 나는. 풍성하고도 깊이 있는 경험과 사유가 없는 그저 일기에 지나지 않는 글. 나에게 뼈저린 성찰을 던져주셨던 박스테파노 작가님의 글을 잠시 인용하고자 한다.

자전적 에세이를 문학의 자리에 둘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렇게 말한다.

사적인 회고일지라도 그 속에서 세계를 관통하는 상징의 골격이 드러나고, 감정의 표면을 넘어 타인의 체험까지 일깨우는 잔향을 얻는다면 이미 문학의 영역에 들어서는 일이라고.


글은 개인의 사유를 넘어 우리에게 번져야 생명의 숨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 나의 일상과 나만의 생각이 우리로 이어지도록 씨줄과 날줄이 엮어져야만 하는 것. 나만의 이야기는 일기장에 적어야 할 일이란 생각에 그간의 글들이 부끄러워진다.


조급해하지 않아야겠다. 내가 글을 쓰게 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초심으로 돌아가본다. 나의 글쓰기는 신춘문예 등단이 아니다. 나의 글쓰기는 교보문고 신간코너에 내 책을 발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그저 바글거리는 말들을 정리하며 나를 돌아보고자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가. 왜 다른 사람의 글을 부러워하고 있는가 이 말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더 닿지 못한다는 것은 서운한 일임을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는데 지금의 나는 왜 초심을 잃고 조급해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그렇다. 함께하다 보니 참 부러웠다.


질투는 미성숙의 징표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였다는 심리한스푼 작가님의 문장이 이제야 내 가슴에 와닿는다. 나는 이 질투가 가져다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의 경험도, 사유의 깊이도, 번뜩이는 필력도 준비되지 않은 나임을 기꺼이 들여다본다.


억지로 상념을 쥐어짜는 시간 대신 읽고 느끼고 성찰하는 깊은 우물을 만들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일은 그저 곁에 있는 작가님들의 훌륭함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강가에서 물멍 하듯 내 안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글쓰기와 인생의 시간들이

주객전도되어

나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대신에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결을 찾기 위해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히 순리대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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