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자가 내게 건넨 한마디 말.
나는 철학적 면모를 지닌 소녀였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릴 때 깨달았으니.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자란 소녀였던 나. 인생의 풍파를 겪어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엄마랑 함께 봤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가 어린 나를 쿵! 하고 때렸다.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한 대사였던 것 같다. 딸에게 너는 왜 평범하게 살지 못하냐고 했던가, 아니면 그저 딸이 평범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읖조렸던가.. 그러자 딸이 아버지에게 했던 말. 평범하게 사는게 제일 어렵다고. 어린 내가 그 대목에서 왜 쿵!하고 뭔가를 느꼈냐는 말이다. 엄마도 그 대사가 기억나? 그러나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대사. 그런데 왜. 어린 나는 그 대사가 마음에 와닿았을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말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내 인생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을 겪던 젊은 어느 날. 난 남들처럼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휘몰아치는 감정에 나날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일을 해야 했다. 예전부터 정해졌던 약속, 소박한 규모의 작은 강의를 해야 했다. 맡은 일이니 열심히 준비를 할 수 밖에. 두 시간 짜리 강의 중 쉬는 시간. 한 여자가 다가왔다. 내가 준비한 자료들을 살펴봐도 되겠냐고. 내 자료를 한참을 살펴보더니 하는 말.
"재주가 많으면 박복하다던데." 건조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한다.
그 날은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나는 레몬색 민소매 티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왜 그날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가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내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내가 차로 향하던 길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이 여자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건 생각나지 않는다.
칭찬인가 악담인가. 강의가 마음에 안들면 강의 평가지에 악담이라도 퍼붓던가. 그 즈음의 나는 내 인생의 시련에 최고조로 좌절 중이었다. 내 팔자가 왜 이럴까... 처절한 마음이었는데... 무슨 인연으로 이 강의를 맡았는지, 그 여자를 만나고,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서른 살도 안된 젊은 나는 그 순간을, 그 여자를, 그 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소리내어 울었다. 내 편을 들어줄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그 당시 나를 걱정해주었던. 그 여자에 대한 악담을 퍼부어며 나는 울었다. 그 여자는 알까. 내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자의 그 말을 잊지 않고 곱씹고 있다는 것을.
그저 어느 재수없는 하루의 해프닝인가. 하지만 상황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말. 나는 오래도록 그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말을 아끼며 살게 되었다. 또 사람들에게 마음의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에게서 상처받을까봐. 또 내가 무심결에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나는 예민하고 뒤끝있는 사람이다. 아직도 가끔 이 여자의 말이 툭 떠오른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같이 살아가야할 인간 파트너가 독을 내뿜었다. 나는 사람이 공해라고 생각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중년의 여자의 말. 그 여자는 나를 부정적 인간으로 만드는데 큰 몫을 기여했다. 사람을 공해라고 생각하는 부정적 인간. 게다가 그 여자는 교사다! 한마디 말로 그 사람 전체를, 어느 집단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안다. 하지만 만일, 정말 그 여자가 일상에서 그런 독을 내뿜는 사람이라면. 그 여자와 인연이 닿은 아이들에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끔찍하다.
어떤 말을 하고 살아야 할까.
나는 누군가에게 향기가 되는 사람이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공해처럼 느껴지는 사람일까.
나의 성격적 결함, 극히 예민하고 뒤끝있는 성격 탓으로 아직도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