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처음으로

혼자 쓰는 일기 2026. 1. 29.

by 봄비

나의 시간들을 함께 한 피를 나눈 사람들. 참 좋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지금은 참 좋다.


언니(외사촌)와도 시절을 겪으며 부모들의 일로 소원해지기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인생의 일들이 돌고 돌아 지금 우리는 화해의 무드 속에 지내고 있다. 그 옛날, 장남으로서의 대우와 혜택은 누렸으나 외할머니를 모시지 않으려던 큰외삼촌 가족들. 그러나 이빨 빠진 호랑이, 세상모르는 것 없는 '나잘난' 그 외삼촌이 나이 앞에 무너져 어린아이가 된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이가 다 된 외삼촌을 혼자 모시고 사는 언니의 시간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이가 드니 생기는 마음일까.


어려운 사정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어린 언니를 나의 외할머니는 애태우며 보살폈건만 성인이 된 언니는 외할머니를 거부했었다. 아들 집에서 살지 못하고 딸네 집에 살게 된 노후의 시간들을 나의 할머니는 애달파했다. 할머니 한 분을 두고 어린 시절 우리는 경쟁을 했었다. 언니는 자기 할머니라고, '외'자를 붙여야 되니 할머니는 너의 할머니가 아니라면서. 그렇게 욕심냈던 할머니건만, 한시도 모시길 거부했던 그 식구들을 나는 미워했었다. 결국 할머니는 끔찍이도 존중하고 키웠던 아들네 식구들에게 거부당하고 슬퍼하며 나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돌고 도는 게 인생인지 언니의 아버지가 어린아이가 된 지금, 언니의 오빠는 제 살기 바쁘고 언니는 오롯이 아버지를 책임지는 상황이 되었다. 언니는 알까. 돌고 돌아 언니에게도 같은 일이 펼쳐졌음을. 그러나 나는 언니가 안쓰러웠다.


시간은 흘러갔다. 부모의 죽음과 노화를 겪어내는 시간들은 언니와 나 사이를 묶어준다. 언니와 둘이서 강릉의 겨울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강릉으로 향하는 내내 언니는 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간간히 동조하고, 간간히 위로하며 우리는 다시 피를 나눈 가족이 되었다. 나의 이야기는 숨겨놓은 채.


모든 걸 다 내려놓은 겨울 산 능선을 지나고 또 지나 바다가 펼쳐졌다. 저 넘실대는 깊고 깊은 물속에 있다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실없는 상상을 하며 함께 무섭도록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 여름 너무도 뜨겁고 적막하던 경포 바다, 그곳에서 시작된 30년 된 해묵은 이야기가 스며 나왔다. 나는 내게서 추억이 되지 못할 20대의 시간과 그 이후 방황의 시간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강릉 경포대가 왜 가슴이 아리도록 아픈지 가만가만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엄마 보고파서 울던 어린 나를 새우깡으로 개울에서 놀아주겠다는 약속으로 달래주었던 언니가 되돌아왔다. 언니는 내 고백을 마음으로 들어주었다. 햇빛을 피한다고 꼈던 선글라스는 눈물도 감추어주었다.


요양보호사 손에 아버지를 맡기고 바다로의 짧은 일탈을 감행했던 언니는 소녀 같았다. 무섭도록 넘실거리는 차갑고도 푸른 겨울바다를 보며 탄성을 내지르고, 특별할 것도 없는 식사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오죽헌의 검은 대나무를 보며 우리는 어린 시절 함께했던 포항 할머니집의 대나무숲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집에서 과자를 사러 걸었던 여름밤의 추억도. 언니와 나는 이문세의 노래를 좋아했고 화음을 넣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세 살 많은 언니는 나에게 화음을 가르쳐주고, 내가 제대로 못하면 잔소리를 해가며 그렇게 노래를 완성하곤 했었다. 언니가 가르쳐준 노래를 나는 뜻도 모르고 따라 불렀다. 바람이 서늘도하여~로 시작했던 <별>이란 노래. 언니, 왜 바람이 선을 더해? 물으며 언니에게 노래를 배워 불렀다. 지금도 나는 반딧불이 간간이 보이는 사택의 밤에 그 노래를 부르며 언니를 생각한다.


세월이 그런 걸까, 아님 피를 나눈 가족이라 그런 걸까. 사실 언니를 미워했던, 아니 그 가족 전부를 미워했던 마음은 희미해졌지만 언니와 함께 한 짧은 일탈 여행으로 그 마음의 흔적도 지워져 간다.


혼자이고 싶지만 또 혼자라 외로운 시간들. 전화기 속 사람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도 없는 듯한 막막한 순간들. 그런 순간들에 함께 할 수 있을 '언니'를 되찾은 기분. 경포대 바다에 아련한 그리움의 추억과 함께 안온한 추억 한 조각이 더해진다.


돌고 돌아 다시, 어린 나를 달래주던 언니를 만나고, 나는 또다시 경포 바다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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