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봐야 안다, 겪어봐야 안다
고백한다. 샤를 보들레르의 글은 읽은 적이 없다. 나태주 시인의 글 속에서 보들레르의 한 마디 말을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러나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나를 깨울 수도 있는 법. 시인은 회복기 환자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그 말이 내 마음에 꽂힌다.
나태주 시인 "달리 보면, 달라 보여"라는 글을 소개한다. 시인은 "결핍의 축복"이라는 말을 한다. 폐병에 걸려 죽다 살아난 시인의 선배는 살아난다는 보장만 있다면 젊어서 죽을병에 한번 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같은 맥락으로 시인은 샤를 보들레르의 말을 전한다. 시인은 회복기 환자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출처 : 나태주의 인생수업, 中>
환자라는 워딩에는 결핍, 실패, 고통, 아픔이 전제되어 있다. 이 세상 누가 환자가 아니겠는가 싶다. 크든 작든 어떠한 결핍을 겪으며 사는 게 인생인데. 우리는 모두 환자다.
결핍은 그저 결핍일 뿐, 결핍이 어떻게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누가 축복을 위해 결핍을 겪고 싶을까.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결핍의 시간을 겪을 수밖에. 그러나 누리던 것들을 잠시 빼앗긴 뒤 그것들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는 것. 어쩔 수 없이 겪는 결핍이라면 그 일들을 축복으로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일상을 받아들이는 절실함의 차이가 다를 것이다.
코로나로 격리되었을 때의 기억. 얼마나 외롭고 불편하던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던 날, 출근도 축복이 되었다.
다친 손가락 때문에 불편투성이인 일상. 내 몸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게 이렇게 자유로운 일이었던가.
어쩌다 생긴 빚. 내내 짓누르던 그 무게가 사라지던 날. 통장은 가벼워도 빚 없는 가난이 당당하다.
나만의 동굴이 되어주던 내 차가 아플 때. 낯선 렌트카와 만난 나는 깜빡이도 겨우 켜는 초보운전자가 된다. 그러다 다시 만난 내 차. 얼마나 애틋하고 반갑던지. 나는 다시 레이서로 돌변한다.
자신만만하고 세상 두려울 것 없던 어리고 젊은 내가 인생의 사건을 만난다. 그 이후 세상을 두려워할 줄 알고 겸손해지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과 동떨어져 하루살이처럼 살던 시간 중에도 행복하고 감사한 순간들은 있었겠지. 하지만 그 순간들을 그저 그 빛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사한 일상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그 이면을 미리 걱정하고 들춰내며 내 속을 들들 볶으며 괴롭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행복한 일에도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의 그날. 나도 이 날 광복을 맞이한다. 30년 쇠말뚝이 박힌 채 실패라는 두 글자에 지배당하던 그 시간으로부터. 광복의 태동은 나의 용기였다. 외면하고 덮어두고 회피하던 지난 시간을 직면해 보겠다는 용기. 덕지덕지 붙여둔 반창고며 붕대를 들추어내고 상처를 들여다본다. 많이도 곪고 깊었던 내 상처를 마주하던 그즈음, 자가치료가 필요함을 절절히 느낀다. 브런치스토리라는 병원을 찾아 똑똑 노크하던 그날. 2025년 8월 15일이 바로 나의 광복의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찾은 병원은 나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이제서야 나에게 회복기가 온 것.
회복기 환자인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지루한 일상이 감사할 뿐이다.
밤늦은 또는 이른 새벽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 날.
엄마가 여전하여 고등어 한 마리 뼈만 남겨 놓는 식사 시간.
연세 많으신 우리 아부지, 적당히 막걸리 드시고 일찍 주무시는 날.
매일 아침 숲 속 산책길에 뱀에게 물리지 않은 날.
깨알 같은 잔소리와 지적질할 상사가 출근하지 않는 날.
우리 반 말썽쟁이들 내 기를 쪽 빨아먹고 까불다 돌아간 오후.
온통 내 마음을 가져갈 누군가가 없어서 평화로운 요즈음.
그래서 혼자 글을 쓰고 있는 이 가을을 외롭다 생각하지 않는 지금.
그런데 이런 일상을 감사하는 마음을 넘어
지루한 일상 속에 묻혀 버릴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시인의 예리함까지 바라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