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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교 Nov 18. 2020

여성과 남성의 역할

부모로서의 여성과 남성

본 글에서는 여성/남성의 성 역할을 사회학적 관점(젠더 이론)이 아닌 교육의 관점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구체적으로 '남/녀의 역할'은 아이를 기르는 문제(교육)에 있어서 구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구분될 수 없는가?


오늘날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논쟁적이다. 두 성별이 서로를 향해 적대하고, 각자의 이해 관심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이 논의는 끝이 보이지 않으며, 설사 끝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형태는 파국이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할 지라도 남녀 문제를 놓고는 입장이 다르며, 자칫 얘기를 꺼냈다가는 싸우고 갈라서기 십상이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속에는 긴장이 있으며, 말할 수 없는 불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남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건설적인 화해의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다음의 사안만을 두고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이래 한국에서는 남/녀를 바깥사람/안사람으로 구분해왔다. 바깥사람으로서의 남성은 직업을 통해 돈을 벌어오고, 안사람으로서의 여성은 집안일과 양육을 맡는다. 그러나 현대에 들며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맞벌이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맞벌이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남성도 육아와 살림을 동등하게 짊어지라는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 (혹은 무책임하게) 말하면 남녀 5:5로 모든 일을 나누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이 칼로 자르듯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무엇이 5:5인가? 한쪽이 음식을 준비하면 한쪽은 설거지를 하면 만족스러운가? 한쪽이 빨래를 널면 한쪽은 청소기를 돌리면 되는가? 아니면 모든 일을 같이 하면 되는가? 이런 사안은 비교적 타협이 가능하다. 문제는 월급의 차이에서 발생하게 된다. 한쪽이 월 500만 원을 벌어오는데, 한쪽이 월 200을 벌어온다고 하면 문제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집안일은 5:5로 나눌 수 있었지만, 월급에서 그렇지 않다 보니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여성이 월 200만 원을 버는 입장에 놓여있다면, 그리고 출산과 양육으로 인한 경력단절의 문제가 얽혀있다면? 논의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럴 때마다 군대와 임신에 대한 비교 논의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두 대상을 놓고 공평을 논하기에는 어딘가 결이 다르다.


위의 전개는 남녀의 역할을 두고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방식이다. 일단 나의 기본적인 입장을 밝힌다. 남녀의 역할은 5:5로 정확히 나누는 것은 불가하다. 역할은 양적이기보다 질적으로 차이를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배려와 희생은 불가피하기에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을 누가 더 많이 벌고, 살림을 누가 더 많이 하고, 남녀의 역할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하고. 이러한 식의 손익계산은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신 두 남녀가 사랑을 통해 결합하고 가정을 이루는 형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어느 순간 이해관계에 대해 눈 감고,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남녀의 역할 구분 문제로 돌아가 보자. 자녀 양육의 문제를 예로 놓고 말이다. 우선, 다소 거칠기 짝이 없는 비현실적 예시를 깔아놓도록 하자.


여기 결혼한 한 쌍의 남녀가 있다. 두 남녀의 나이는 22살이다. 성장 배경은 둘 모두 비슷하며,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한 것 없이 성장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였다. 곧바로 남성은 군대를 다녀왔고, 여성은 출산을 하였다. 두 남녀는 군대와 출산에 관해 서로 고마움을 느끼며, 각자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둘은 공부를 하여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경제력이 없는 탓에 생활비는 각자의 부모님에게서 5:5로 지원받고 있다. 더 나아가 대학 생활을 위해 친/외가에서 5:5의 노력을 분담하여 아이를 맡아주기로 한다. 부부가 공동으로 부담해야 할 일은 오직 살림과 육아 둘 뿐이다.

 

이 부부는 조건이 동일하다. 경력단절의 우려도 없고, 월급으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집안일 5:5로 나누고, 육아도 5:5로 나누면 모든 것이 완벽하겠다고. 그러나 전자(집안일)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육아/교육의 경우에는 사안이 전혀 다르다. 육아를 5:5로 나눈다는 것? 어떤 기준으로? 이것이 본 글의 문제의식이다. 계산상으로는 육아를 정확히 반씩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아이를 안아주는 일 5:5, 기저귀 교체 5:5, 모유 먹이기(남성의 경우 저장해둔 모유를 젖병으로) 5:5, 당직 개념으로 밤새 아이 돌보기 5:5 등등.


아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상대적으로 신체에 지방이 부드러운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이 편안한가? 아니면 근육이 많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 편안한가?


말 못 하는 아기에게 무엇이 좋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의 품보다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한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부드러운 품에 안기는 쪽이 더 기분 좋은 일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이 점도 고려해볼 만하다. 어머니의 품과 아버지의 품은 그 의미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의 품이 따뜻한 둥지라면, 아버지의 품은 서당이나 피난처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더 유익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을 아이는 더 만족스럽고 편안한 얼굴로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안아주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5:5가 아니라 아이의 표정에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르겠다. 때에 따라 7:3 또는 9:1까지도 비율이 조정될 수 있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양육의 문제는 남녀에게 공평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 로봇이 아닌 '살아있는 아이'가 가정에 놓여있는 한 남녀의 역할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전 시대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교육에 관한 한 성역할은 고정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은 한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기여하는 영역이 다르다고 파악되어 왔다.


"여성은 아이를 바깥 세계로부터 보호하고자 끌어안는다면, 남성은 아이를 독립시키고자 바깥 세계로 내보낸다. 여성은 아이가 가정에 머물기를 원하며, 남성은 아이가 사회에 머물기를 원한다."


이것이 교육에 관한 한 대표적인 남녀의 역할 구분이다. 그런데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남성이 돈을 벌고 여성이 가사를 하는 것과 별개로 이 일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남성이 아이에게 개입하기 시작한다. 여성과 남성 모두 아이를 진실로 사랑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해와 표현 방식이 다르다. (아래 말들이 대단히 논쟁적이며, 편견에 기초한 것일 수 있으며, 개별 가정마다 아이를 양육하는 법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의 내용이 전혀 틀렸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경향과 흐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이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아이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면 그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며 불 속으로라도 들어가 그를 품는다. 반대로 아버지는 아이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면, 아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인지를 고려한 후 용기 있게 스스로 걸어 나오라며 시선을 거둔다.

어머니는 아이가 놀 때 몸에 상처가 날까 염려하며 계속해서 그를 지켜본다. 아버지는 상처에 개의치 않고 흙탕물을 뒤집어 씌우며 오히려 더 거칠게 아이와 논다.

어머니는 아이가 다른 또래와 갈등을 한다면 직접 개입하고 중재하며, 그를 위로한다. 반대로 아버지는 아이가 또래와 갈등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며 오히려 더 싸워서 승리할 것을 요청한다.


이처럼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른 이유를 젠더 이론에 따라 사회적 규정과 학습의 결과 때문이라 말해도 좋다. 혹은 대하는 방식은 개인 차가 크고, 때에 따라서는 아이를 위해 두 역할을 모두 연기하고 흉내 내야 한다고 요청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아이의 고통(아이를 불구나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유익한 고통)을 마주시키고 견뎌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함께 고통스러워하다가 끝내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견디는 일은 남성에게 조금은 더 유리할 수 있다. 반대로 아버지에게 공평한 육아/교육의 역할을 주장하며 여성에게 보다 친숙한 태도를 요구할 수 있을까? 사회학자들이 무시하고 싶겠지만, 인간은 다른 성으로 태어난 이상, 자신의 자녀에게만큼은 동물적으로 천성적으로 발휘되는 특정한 경향이 있다.


육아와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남성과 여성은 사회학적 존재로서의 젠더가 아니라,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여성과 남성 각자에게는 더 크게 작동하는 호르몬이 다르고, 뇌의 구조도 판이하다. 바로 이 호르몬과 뇌는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을 절대적인 힘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기존까지 집안일과 양육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여성에게 떠넘긴 것은 분명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기준은 공평함이라는 차원에 앞서 남성이 교육에 있어 아이에게 고유하게, 특수하게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있음에도 그것을 담당하지 않았다는 식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평함을 절대적인 노동의 그 무엇으로 파악해버린다면, 가사/육아노동은 직장에서의 노동과 비교되며 화해할 수 없는 갈등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아이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 동등한 책임 의식과 실천은 있으나, 역할에서의 평등은 없다는 입장이다. 앞서 말했지만, 아이를 놀아주는 일에 있어 5:5의 시간 분배를 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5:5의 내용을 채우는 방식에 대해서는 남녀가 이해하고 지향하는 놀이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는 연령과 기질에 따라 그 비율이 다르게 조정되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하다. 육아에 관한 한 사회적 논의가 계속해서 두 어른의 이해 관심과 노동의 양으로 수치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육아에 관한 남녀의 역할은 '아이'의 바른 성장이라는 기준에 근거하여 비교되고, 분배되어야 한다.


두 남녀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고결한 아이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두 부부가 모든 것을 칼로 나누듯이 하기보다는 각자에게 더 특화된 나름의 역할을 책임감 있게 해내는 일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아이는 식물이 아니므로, 물만 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누가 물을 주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오히려 물을 주는 사람의 특성과 성품이 아이에게는 진정으로 필요한 '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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