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주체적인 삶
배꽃나래 감독은 할머니를 카메라에 담았다. 78세 안치연 할머니는 70 평생 글을 모르고 살다 몇 년 전부터 노인 한글학교를 다닌다. 그곳은 다 여성뿐. 조선 시대 이후 많은 여성들은 글을 배울 기회를 빼앗겼다.
안치연 할머니에게 글을 배우는 건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감독이 할머니를 따라 화장실을 들어가서 벽에 붙어있는 자음 모음 종이를 찍자 뭘 이런 거까지 찍으냐고 투정한다. 한글 공부하는 할머니 옆에서 비뚤게 적은 단어를 찍자 오른쪽으로 글자가 자꾸 눕는다고 부끄러워한다. 성경 모임에서 성경 책을 다 같이 읽을 땐 다른 사람들보다 반박자 늦게 손으로, 입으로 한 음절씩 따라 읽는데 한 교인의 말이 할머니를 울린다. 한글 공부하는 할머니 부끄럽게 생각하는 가족, 손자 없다고. 할머니를 멋지게 생각한다고. 감독의 카메라는 촉촉해지는 할머니의 눈을, 표정을 오랫동안 담는다. 조급하고 답답했던 마음들이 조금은 녹았을까.
문자를 모르는 사람의 기억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많은 여성은 어린 시절 어딘가에서 나름의 기록을 남겨두었다. 종이 위에는 없고 명확한 이름도 없는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것이었다
영화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감독 내레이션
문자를 몰랐던 할머니들은 공통적으로 몸에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기릉지라 불렀다. 바늘에 실을 끼우고 먹물을 먹여 살을 뜨는 일종의 문신 같은 거다. 여성들끼리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소위 찐친을 맺으며 서로에게 해주는 기록이었다. 세 분의 할머니는 수십 년이 지났지만 누구와 어디에서 기릉지를 맺었는지 선명히 기억했다. 추억을 회상하는 일기장 같은 기능을 했고, 문자를 대신할 또 다른 언어였다.
영화 말미, 감독은 할머니에게 카메라를 건넨다. 찍고 싶은 꽃 찍어보라고. 할머니는 집안에 줄지어있는 화초, 책장을 차분히 훑는다. 앵글은 비뚤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자꾸만 카메라 뒤의 할머니가 상상되는데, 이렇게 찍어볼까, 저렇게 찍어볼까 고민하셨을 거다. 카메라를 든 할머니는 직접 이야기를 쓰는 주체가 됐다.
“내가 일기를 쓸 수 있으면 옛날에 있던 얘기 다 쓰고 싶어. 내가 그런 걸 다 알면, 책을 냈으면 몇 수십 권 내고 영화라도 찍을 거여”
영화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안치연 말
옛날 한국의 여자들이 언어를 배웠다면, 본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성차별적인 권력 구조가 애초에 형성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멀리 가지 않고 여성 개인의 삶을 볼 때, 문자를 읽지 못해 움츠려 들고 많은 것을 포기했던 삶 말고, 조금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뭉클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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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이었던 영화의 인트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블랙화면에 할머니의 목소리와 텍스트만 나온다.
안치연 할머니가 더듬더듬, 틀린 음절은 다시 돌아가 고쳐가며 문장을 읽는데 할머니의 속도를 기다리며 그 문장을 따라간다. 몰입도 높았던 순간.
최근에 본 영상들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잡아두는 인위적인 장치 범벅이었다. 쿵, 두둥 같은 효과음, 디지털 줌, 각종 그래픽. 이것들 없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몰입시키는 인트로였다. 힘 있는 영상은 인위적인 장치 없이도 자체로 몰입시키는 것. <KBS 다큐 인사이트: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나 영화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