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진정성
다큐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의 마지막 부분, 손녀 배꽃나래 감독은 할머니에게 카메라를 건넨다. 찍고 싶은 걸 찍어보라 한다. 할머니는 거실에 줄지어 있는 화초, 그 옆에 서있는 책장을 차분히 훑는다. 앵글은 기울었고 화면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2021 제1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소설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은 카페 안, 불이 꺼졌다. 빔 프로젝터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할머니의 첫 영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할머니의 영화가 시작되고. 검은 화면에 떠오르는 할머니의 이름. 제목.
감독 최정희. <영화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사람들이 웃는다. 화면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면, 스크린에 할머니가 나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과를 먹습니다. 사과를 깎아요. 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에이. 할머니는 혼자서 사과를 깎아먹으며 아무런 말이나 한다. 사람들이 웃는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 할머니가 직접 촬영한 숏들. 흔들리는 카메라. 할머니가 바라본 거실. 할머니가 바라본 주방, 식탁, 도마와 식칼, 침대, 이불, 안마기, 책, 구겨진 신문, 가족사진, 담배, 안경, 시계, 칫솔, 슬리퍼, 사과 반쪽. 할머니가 바라본 거울 속 할머니. 나는 이제 혼자 살고 있어요. 아무런 맥락 없이, 영화 속에서 할머니는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도무지 할머니의 연출 의도를 모르겠다. 할머니는 그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 서이제 <0%를 향하여> 290p
카메라 뒤 모습을 상상한다. 카메라를 어색하게 붙든 할머니의 손. 카메라를 잡은 마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두 컷 모두 찍은 사람이 익명이 아니다. 할머니가 가진 서사가 강력하다. 덕분에 앵글이 비뚤어도 괜찮다. 카메라가 흔들려도 이해한다. 없던 의미도 만들어낼 정도로 열린 마음으로 본다. 몰입도가 높다.
서사의 중요성. 출연자의 서사 못지않게 때로는 카메라를 잡은 사람의 서사로 영상이 힘을 받기도 한다. 왜 카메라를 들게 됐는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자전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더 간다. 이길보라 감독의 <반짝이는 박수 소리>, 구윤주 감독의 <디어 마이 지니어스>도 공감하면서 본 인상적인 영화다. 이들은 어째서 카메라를 들었을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본다. 감독의 '진짜' 이야기는 진정성이 짙다.
감독들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에 박수를, 개인적인 경험에서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감각을 욕망한다. 독립 다큐의 세계가, 다큐를 찍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 큰지 아직 잘 모르지만 많은 난관에도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기대되는 영화 박마리솔 감독의 <어쩌다 활동가>. 어느 순간 사회 활동가가 된 엄마를 카메라에 담으며 점차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평.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