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유치원 연중행사인 아버지 참여 수업의 날이라는데, 할당된 시간이 3시간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체력이 감당해낼 수 있을까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그저 준비하시느라 애쓰셨을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폴더 인사를 거듭 드리는 것 외에 감사를 표할 길이 없었다.
연을 만들어 날리고, 추억의 달고나를 만들어보고, 야채를 잘라 피클을 만들어보고. 혁이의 작은 손을 거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나서 라떼는 말이야를 연신 거듭했지만, 말에 비해 애비의 손재주는 형편없었다. 연은 실이 너무 짧았고, 피클은 넘쳐 뚜껑이 닫히질 않는가 하면, 달고나는 누름판에서 아예 떨어지질 않아 별모양 틀을 박아넣을 새도 없었다. 실망한 기색도 없이 받아주는 혁이가 애비보다 의젓하더라.
만들기가 끝나고 나니 혁이는 나를 조용히 산으로 데려간다. 금요일마다 오르는 곳이라는데, 꽤 멀다. 왕복 40분. 덕분에 소곤소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다녀왔다. 감기 약효 탓인지 조금은 조용하고 차분해진 혁이, 멀다고 혀를 내두르는 애비. 부자지간에 평소 묵힌 말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저 순례길 다녀오는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함께 해낸 이정표가 생겼고, 걷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왁자지껄하게 구성했을 수도 있는 프로그램인데, 자녀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신 유치원의 배려가 느껴진다. 아들이 만들어 준 이름표를 달고 나니, 내 이름 석 자로 사는 트랙 말고 혁이 아빠로 사는 길이 설렌다. 오늘은 시종일관 네가 앞장서더라. 앞으로도 그럴 것 같네. 애비는 보물 찾기만 좀 도와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