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기 직전의 어린이날 아침, 애비와 어린이는 길을 나선다. 완주군청 옆에 복합문화지구가 있단다. 완주군은 이런 문화콘텐츠 전문이어서 어린이도 즐길 거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
혁이가 50분짜리 프로그램을 즐길 동안 애비는 아리따운 혁이의 어머님과 진한 커피 한잔 마시며 유쾌해져 어린이의 마음으로 광활한 잔디를 즐긴다. 잔뜩 찌푸렸지만 아직 비 내리기 전이다.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관에서 만든 곳이니 정치인들에게 어린이의 웃음 정도는 서비스해 줘야지.
다음 코스, 손수건 물들이기! 입장시키려는데 정성껏 준비한 선생님들 민망하게 혁이가 단호박으로 싫단다. 책상 앞 치열한 어린이들 간의 경쟁, 질서를 호소하는 선생님의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날씨+어린이날이 주는 기본 압박감+부대낌에 지쳐 신산스러운 부모님들의 표정에 분위기를 감지한 것 같다. 입구부터 고개를 젓는 혁이에게 평소보다 다정하게 다가서 본다.
오늘 아침부터 여러 번 다짐했다. 어린이날 내가 잠깐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인간이 아니다. "혁아, 저거 재미는 없어보이긴 하는데, 마치고 나면 할머니께 가져다 드릴 멋진 손수건 선물이 생기는 거야. 가져다 드리면 좋아하시겠지?" 녀석의 효심을 자극해본다. 매일마다 부족함 없이 꼴을 먹여주시는 그 은혜를 저버리진 않겠지 네가. 그렇다. 먹혀들었다.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고무줄로 매듭을 만들어 손수건을 묶었다. 매듭에 따라 문양이 달라질 터. 이걸 한데 모아 어딘가에 담갔다가 다시 나눠주는데, 담갔다 꺼내는 그 찰나 동안 아비규환이 벌어지며 서로의 작품이 온통 뒤섞였다. 연못 속에서 금도끼 은도끼를 찾는 심정으로 이것저것 들이밀어보지만, "내꺼 아녀!" 이미 맘은 상할 대로 상했을 터.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선생님들도 위기를 직감했다. 황급히 고무줄을 공수해온다. 고무줄은 단 한개! 하지만 아까보다 더 잘 만들어보자. 가운데 한번만 묶더라도 제대로 묶어보자. 얼마 전 귀한 분도 보고 오셨다는 로스코 그림처럼 가운데 한 줄 오묘하게 그어보자. 염료는 양파물이다. 캬 마셔도 되것네잉. 몸에 좋단다 혁아. 10분간 기다리라네. 지루하지? 조물조물 눌러주면 더 잘 스민다네. 비빔면도 오른손으로 왼손으로 두손으로 비벼도 3분 컷인데 10분이라니. 애비가 생쑈라도 해보마. 몇 분 남았어? 1분. 에라 봉다리 뜯어불자.
자잔. 오. 동그라미가 생겼네? 야 이거 무슨 요가용품 같다. 명상해도 되것어잉. 할머니 좋아하시것다. 기념사진 한 컷 찍자. 로스코는 무슨.
딸기청 만들기가 하나 더 남아있었지만, 비가 너무 내린다. 일단 작전상 후퇴다. 어린이, 너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황급히 퇴각하는 길에 흩뿌려진 꽃잎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뒤돌아본다. 딸기청보다 곱네잉. 혁아 딸기청도 만든 것으로 간주하자. 오늘 덕분에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