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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May 13. 2023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고

권여선 소설집 [각각의 계절] 중

몸도, 마음도 바뀐 계절에 적응해 가고 있나 보다 생각할 무렵, 선물이 왔다. 권여선 작가의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 책을 좋아하는 직장 동기가 보내준 마음이다. 읽고 싶은 책을 집어 들며 같은 취향을 가진 이를 떠올려주는 마음이라니. 게다가 선택된 황송함이란.


고질적인 분할 수면이 도져 깨어난 새벽녘 접한 첫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서 머물러 도무지 다음 장을 펼치질 못하고 있다. 슬프게도 50대가 되었음직한 주인공 세 여인도 그 새벽에 자주 깨어 머물고 있다. 30대가 저물 무렵 먼저 떠난 친구와, 파탄 난 우정의 조각들을 쓸쓸하게 꺼내보며.


30년 전이라니 아마도 80년대 말 운동권이었을 하숙집 옆방 친구 넷. 그 시절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로 걸어들어간 이들끼리의 유대는 유별났을게다. 통일 운동, 소설, 연극. 거꾸로 난 비늘처럼 세상 모두가 향하는 역사의 정방향인 풍요의 길과 불화하고 관계 맺고 있는 거의 모두와 싸워야 했을 것이기에. 서로 어지간히 돌볼 수밖에. 아니, 더 정확히는 같이 걷던 한 줌의 이들마저 기득권의 무대로 이전한 뒤에도 뒤안길에 남았기에 외로웠을 거라 말해야 할까.


그렇게 돈독했을 넷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시절의 칼날이 무엇이었는지는 요약할 수 없다. 그저 같이 읽고 아파해야 할 도리 밖에. 타협할 기회들을 수없이 흘려보내고, 잔을 부딪힐 이도 없이 홀로 그 계절에 갇혀 독하게 취기로 남아 있는 이가 권여선인 것 같다. 불편하고, 지긋지긋하고, 바보 같고, 원망스럽고, 애잔하고, 안타깝고, 미안하고. 그래서 한참을 울었으리라. 동이 터올 무렵 그 마음이 느껴져 문득 나도 취한 것 같았다.


소설에서 친필이 담긴 엽서가 툭 떨어진다. '어느 시절을 살아내게 해준 힘이 다음 시절을 살아낼 힘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제와 오늘 사이의 미세한 단층과, 그 틈 사이에 배인 눈물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목소리를 같이 읽자는 이가 있어 고맙다.


#각각의계절 #권여선소설집 #사슴벌레식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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