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혁이아빠 Mar 26. 2023

생활의 영토전쟁 -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서평

주의. 이 글은 남자, 특히 기혼 남자에게 매우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엔 좀 불편하고 쉽게 넘기기 어려웠다. 이 소설의 독창적인 문체와 이야기 방식 탓에 어색한 것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단순한 열정>에서도 같은 느낌이었네. 왜 그랬을까? 대개 소설이라 하면 ‘줄거리’가 어떻게 돼? 라고 묻는데, 아니 에르노의 이른바 오토 픽션들은 줄거리란 것이 손에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었나.


여성 독자들과의 대화 후 혹시 남자라는 내 입지가 문제였나 자문해본다. 남녀로 마주앉아 작가의 수다를 듣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밑도 끝도 없이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정말 마주앉아 듣고 있었다면 커피를 빨리 마셔버리고 빠져나갈 명분부터 궁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끝까지 들어주더라도 이 소설을 요약하는 표현에 바뀌는 것은 없다. 그냥 ‘학창시절, 연애와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한 여성의 분노와 각성의 연대기’라고 대꾸할 수밖에. 흔히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지만 철저한 자기 객관화에 성공했다고 상찬하는데, 그 말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초지일관 자기 입장뿐이다. 성공한 기업인의 자서전처럼 자랑 일색은 아니지만, 대신 끝없는 자기 비하와 콤플렉스 범벅이다. 못생기고 키 크고 공부까지 잘했던 여성이라며. 남자 독자는 슬슬 분위기를 감지한다. 불편하겠군. 내리 반성문이나 쓰게 생겼군.

 

하지만 좀 더 솔직해지자면, 한번 읽기 시작한 눈을 책에서 떼기도 어렵다. 다 읽고 나면 책이 밑줄로 범벅이 되어버리는데, 처음엔 이유를 알 수 없어 얼떨떨하다. 왜 이렇게 찰지지? 어설프게 객관화하지 않고 철저히 여성의 자리에서 일관하기에 갖는 설득력인가. 하늘의 페미니즘 말씀이 육화되어 생활의 옷을 입고 나타나서인가. 여성독자들이야 공감할 제목이 많다. 일그러져 있는, 멀쩡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진작 파탄난 일상의 여남 관계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 해방감, 나아가 치유까지. 그렇다면 남성에게 느껴진 그 감정은 무엇일까. ‘이 책을 계기로 일상의 성평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여성들의 연대와 홀로서기를 응원합니다.’ 이런 착한 반성?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멀찍이 둘러 앉아 관람하며 한가한 촌평이나 하게 내버려두질 않는다. 남성 독자의 멱살을 잡아 자기 앞에 세운다. ‘아니, 그렇게 만든 게 너라고!’

 

변명 좀 하자. 요즘 남자들은 이따위로 하면 못 살아남아. 나도 나름 노력했어. 잠깐 외국 생활하면서 도움 없이 독박육아도 좀 해봤고, 애 이름도 아빠, 엄마의 성을 하나씩 따서 나름 소심한 양성쓰기도 했어. 작가가 주문하는 것처럼 가사도 결혼 전부터 칼같이 업무분장 했거든. 밥상 차리기 빼고는 전부 내 일이라서 책임소재도 분명해.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끼어들며 신경을 좀먹는 가정의 대소사 이야기, 그거 사실 나도 공감했어. 상당부분은 내 얘기거든. 지금은 아프다는 이유로 육아에서는 열외 했지만. 이렇게 투덜거리며 읽어내려 가다 그녀의 억센 손아귀에 머리끄덩이가 잡히는 시점은 이를테면, 여기다.

 

“물론 그는, 나의 용기를 북돋우고, 내가 교사 시험에 통과하기를 바라고,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실현’하기를 바란다. 대화는 항상 평등에 관한 것이다.” (184p.)

 

쪼그라든다. 겉으로, 입으로는 깨인 척, 여성의 삶에 관심있는 척, 페미니즘의 옹호자인 척 하던 내 눈 앞에 칼이 훅 들어온다. 이후로는 읽는 내내. 도망갈 곳 없는 펜싱경기장 같은 곳에서 아니를 마주보고 악전고투해야 한다.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지금 내가 책 읽었다고 글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아내는 아들 재우느라 씨름하고 있다. 내가 읽고 생각할 시간을 더 많이 누린 결과 그럴싸한 말을 일기에 쓰고 있는 동안, 아내는 내 글감인 일상을 자아내고 돌보고 재우고, 그리고는 피곤이 밀려와서 잠들고 마는 것이다. 남성들이여, 당신과 관계맺고 있는 여성과 생활의 영토를 재측량하시길. 각각 점유하고 책임져야 하는 온당한 면적이 얼마인지. 부당한 관계가 재생산되는 구체적인 맥락들을 샅샅이 살피는 방법은 책에 잘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길. 알아. 정치적 올바름 따지는 삶이란 무척 피곤하지. 입으로 말고 몸으로 자문하며 계속 생활의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하니까. 말했잖아. 불편할 거라고.


남성독자들이라면 책을 읽고 숙제를 해보길 권한다. 육아에 지쳐 넋이 나가 있는 아내에게 넌지시 물어보시길.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주어지는 시간의 단위에 따라 다를 터이나, 장기적인 관점이라면> 내 아내는 단호하게 말한다. 일하고 싶다고. 그리고 유아동반 없이 여행하고 싶다고. '나 일하잖아'라는 말 이제 그만하자. 일 vs 가사+육아.  무엇이 힘든지 당신도 솔직히 알잖아.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남길 수 있는 것도 결국 - <하루도 사랑하지 않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