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푸른 나무가 외롭다. 둘러싼 무채색 탓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그루터기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 나무가 아니다.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는,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는 나무. 차분한 표지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의외로 처절한 복수극에 가깝다.
성장을 멈추고 거대한 복수의 정념을 응축해 온 나무는 인간을 지정해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제목처럼 단 한 사람이다. 목하 죽어가는 숱한 이들을 보여주고, 그중에서 단 한 사람만 살리라 명한다. 그 모진 중개자 역할은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모계를 따라 유전된다. 여인 삼대가 뿜어내는 한과 절규가 책장마다 절절하다.
그래도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일말의 보람이라도 기대해 보지만 매번 좌절의 연속이다. 이런 식이다. 나무의 정령은 죽어가는 피해자와 범인을 보여주고는 범인을 살리라고 지목한다. 이어지는 지명도 무작위에 가깝다. 선과 악, 공리주의 같은, 인간의 공동체를 지탱해왔던 가치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긴다. 천자, 천자의 딸 미수, 미수의 딸 목화는 그 뜻 모를 선택을 감당할 수 없어 그 일이 있을 때마다 기진하고 만다.
신은 사실, 생명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던 힘을 무의미로 만드는 죽음 앞에서 신은 그 무자비한 면모를 드러낸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죽음의 공포 앞에 몸서리치던 나의 시간과 다시 만났다. 생사에 무심한 신 앞에서,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며 나는 얼마나 애원했던가. 곁의 환우들이 아니라 내게만 추가된 연장전을, 나는 신이 차별한다 말하지 못하고 은총이라 찬양하지 않았던가.
내게도 그랬듯, 최진영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녀들이 숱한 죽음을 목도하며 억울과 비참, 허무의 시간을 고통 속에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의 길은 조금씩 열린다. 나무가 명령하는 부조리한 퀘스트를 울며 불며 수행하면서, 그렇게 공고하던 인식의 체계를 부수어 가면서.
우리가 발전이라 믿었던 과정은 사실 더 많은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여럿 중에 한 사람만 골라 살리는 것이 가혹하듯, 여럿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하자는 말도 동일하게 의문에 부쳐야 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올려놓고 경중을 다는 양팔 저울이 있을까. 생명 각각의 무게는 사실 우주와 같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는 '단 한 사람'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전쟁과 폐허를 경험한 할머니 천자에겐 생이 기적이었다. 산업역군이라 불리던 젊은 생명들이 숱하게 으스러져가던 시대를 지나 온 미수에게 목숨 하나만 살리라는 것은 '겨우'였다. 그리고 이제 작금의 시대를 맞이한 그 딸 목화.
의대를 가야 해, 아니 인서울이라도. 어느 대학을 가면 삶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함수처럼 그려줄 수 있다며, 공식으로 삶의 값과 서열을 계산해 주는 세상에서, 목화는 생을 무엇이라 말할까. 붙잡을까? 아니면 저주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죽음을 명령하는 나무를 목화는 도리어 품는다. 목수가 되어, 나무를 다듬는 것을 업으로 택하면서.
나무의 결이, 눈송이 결정이 제각각 다르듯, 삶도 고유하다는 진실을 그녀는 응시한다. '단 한 사람'은 이제 저주의 상징에서 생명의 열쇳말이 된다. 남과 비교할 때는 한없이 비참하고 작아 보이던 나의 삶, 잠시 뭉쳐 생명을 이루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우주 먼지에 불과한 것 같았던 내 삶은, 이야기가 끝날 무렵 어느새 치환 불가능한 고유의 결정체가 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형용사들로 다 감쌀 수 없는 고유명사처럼 내 생도, 내가 다른 생을 대하는 마음도 그 '단 한 사람'이길 바라며 책을 덮는다. 덮고 나면 그 대체될 수 없는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내가, 가족이. 시련을 함께 한 고마운 얼굴들이. 그리고 이 책을 함께 열고 덮은 단단하고 분명한 얼굴들. 윤슬 님들도.
천자이고, 미수이며, 목화인 그녀들이 생각날 때 할 일도 하나 갖게 되었다. 죽음을 가질 수 없어 생도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신들은 할 수 없는,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삶과 죽음 사이 그 좁은 틈에 서는 일. 그것이 무엇인지는 최진영을 읽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