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를 보라. 이 헬같은 헬메르라는 남자와 부인 노라의 언쟁의 발단은 이 작품이 오래된 만큼 무척 전형적이다.
남자는 아팠다. 오래 햇볕 좋은 남쪽 나라 가서 요양을 해야 했고, 아내가 돈을 꾸어 요양비를 댔다. 돈을 융통하는 과정에서 친정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다가(여자는 차용증을 직접 쓰지도, 보증도 못서던 시절이었다니) 약점 잡혔고, 그걸 남편에게 지금 딱 걸린 것이다. 자, 누가 미안한가.
물론 비밀을 간직해 온 것은 부인 노라였고, 알게 된 것은 남편 헬 머시기였다.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잠깐 놀랄 수야 있다. 하지만 원인 제공은 자기가 해놓고 이제 병 다 나아서 올챙이적 생각 못 하고 승승장구하는데 약점 잡히게 생겼다며 대노를 한다. 그리고 약점 잡고 있던 자가 약점을 스스로 내려놓자 아내에게 퍼부었던 욕이란 욕을 없던 일로 돌려보려 하는데.....
낙장불입이지. 뱉은 말을 어찌 주워 담겠는가.
작품이 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면 우리 현실이 매워서일 터이다. 조강지처 버리고 더한 막장을 선보이는 숱한 이야기로 단련된 조선 가부장 유교 사회의 그림자 아래에서 자라난 우리 시선에서 입센의 인형의 집 정도야 성에 차겠는가 싶긴 하다. 150여 년 전 그들의 이야기보다 얼마 전 우리 이야기가 더 찰지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싶다.
3군데를 밑줄 쳤다. 여전히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1.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사랑인가. 사랑에 빠져 있는 기분을 즐기고 있는 것인가. 나도 장인어른의 손에서 아내의 손을 넘겨받았다. 그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2. 아내가 만천하에 창피와 모욕을 당할 뻔할 때 '모두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했던 사람은 한 명 기억이 난다. 나를 그 자리에 놓아본다.
3. 여전히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명예는커녕 삶의 이력에서 거의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돈을 버는데 인생을 바쳐야 하지 않았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지킬 가족이 없었다면 좀 가벼웠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위도식할 작정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그럴 수도 없고. 반면 수많은 여자는 여전히 명예를 포함해 자기만의 삶의 궤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희생하게 된다. 보통 육아를 시작으로.
나의 궤적을 스스로 지우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서로 조금씩 지우고 희생해야 아귀가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