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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May 11. 2022

8. 뒤늦게 깨달은 슬픈 내력

간 쓸개 다 내주다. 간내담도암 발견부터 수술까지 #8

1년 전 발병부터 수술까지. 벌써 희미해지는 기억을 대신하기 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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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하기 전날 밤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같이 기도하고 눈물지었다.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전화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간만에 가계도를 그려가며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부계에도 모계에도 대대로 내려온 유산은 없었지만, 병은 꼼꼼하게 유전되고 있었다.


부계에서는 특히 간이 문제였다. 가난이 강제한 혹독한 삶은 유독 간을 파먹었다. 묶인 프로메테우스처럼 한 세대 전 어르신들은 청소업을 영위하며 사용한 독한 약품에, 힘든 일을 마치고 넘기는 한잔 소주에 간을 쪼였다. 지금 내 나이에 돌아가셨기에 뵐 기회도 없었던 큰아버지도 간에 암이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간염으로 오래 고생하셨다. 그리고 몇 달 뒤 확인된 담관결석으로 나와 같은 간 좌엽 절제술을 받으셨다.


모계에도 위험요소는 도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담낭을 얼마 전 떼셨고, 이모는 유방암으로 불과 한 달 전 먼 여행을 가셨다. 빌어먹을 유전의 공식이라니. 간+담낭+암 = 간내담도암. 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나는 슬프고도 정확하게 가족의 내력을 간직했다가 발현시킨 셈이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부모보다 먼저 아프게 된 자식이란 무척 슬픈 노릇이었다. 부모는 멀쩡하거늘 내가 먼저 아프게 된 것을 보면 때이른 병은 분명 나의 잘못인데, 부모님은 혹여 그것이 내가 물려준 슬픈 유전이 아닐까 탄식하지 않으셨을까.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발원했던 당신들의 몸, 그리고 그 부모의 몸이 기원했던 뿌리까지 원망스러워하지 않으셨을까. 그 마음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함께 우셨던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 유전의 지도에 대해 내가 처음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이 여덟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를 낳기 전에 형님을 잃었다. 당신께도 젊은 시절부터 죽음의 공포가 늘 곁에 따라다녔다. 덕분에 아버지는 운동을 열심히 꾸준히 하셨고, 늘 건강을 염려하셨다. 마르고 닳도록 내게 운동을 권하셨고, 몸소 모범도 보이셨다.     


안타깝게도 내게 들을 귀가 없었다. 젊었고, 젊다고 생각했고, 죽음을 마주한 적도 없었다. 내 몸이 어떻게 타고났는지 관심도 없었고, 그저 운동에 소질이 없으니 즐기지도 않는다며 간곡한 당부를 내쳤다. 재미가 아니라 살기 위해 뛰고 또 뛰었던 아버지의 피가 내게도 흐른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한바탕 함께 울고 나서 간곡히 부탁했다. 벗어나기 힘든 그 취약한 유전을 나누어 가진 형에게. 나처럼 늦기 전에 살피라고. 형도 고혈압에 당뇨 초기에 진입한 상태였다. 걷기 싫고 뛰기 싫은 그 귀찮은 성품마저 닮은 형의 뒷모습이 마냥 불안했다.


입원 날이 다가왔다. 마침 서울 집을 정리하고 전주로 이사하기로 한 날과 같았다. 오전 내 정리된 이삿짐이 전주로 출발하는 것을 지켜본 뒤 나는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간병인은 도중에 한 번만 교체할 수 있다. 아내의 기력이 소진되거나 코로나에 감염된다던가 하는 예상치 못한 변수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간병인도 교체선수를 예비해야 했다. 떠오르는 옵션은 하나뿐이었다. 개업을 앞두고 한창 바쁠 친한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해 두었다. 설렘 없이 두렵기만 한 새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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