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재수가 없었던 걸까, 이렇게 되고 말 것이었던 걸까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by 혁이아빠

다시는 권여선 소설집을 읽지 않기로 했다. 아니, 10년 뒤쯤 내가 이 덫에서 완전히 기어 나왔다고 여길 때쯤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삶에서 마주하는 불행과 고통, 그리고 삶이 떠나간 뒤 남겨진 자의 몫까지. 권여선이 그려낸 모든 활자가 나를 송곳처럼 후벼팠다. 권여선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정신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모른 척 하루하루 성실하게! 초긍정! 건강 100세! 부르짖던 내 눈앞에 불행과 고통의 본질이 펼쳐졌다. 안 본 눈 삽니다. 난 차라리 모를랍니다. 발버둥 치며 겨우 도망쳐 나왔다.


'안녕 주정뱅이'는 삶에서 마주하는 불행의 양면을 다 비추는 비극 모음집이다. 그저 재수 없게 걸려드는 우연한 불행도, 그 사람에게 내재된 기질을 끝까지 밀어붙여 맞이한 필연적인 파국도 모두 그리고 있다. 이러니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그저 삶이 건넨 농담에 얻어맞은 이들을 붙잡고 한참을 측은해하다가도, 자신에게 내재된 씨앗을 결국 발아시켜 불행으로 치달아가는 이들에게 '안 돼!' 하고 소리쳤다.


정신 차려 보니 그 완벽한 그물 안에 나도 갇혀 있다. 확률상 일정한 인구가 걸려드는 재수 없는 사건, 하필 걸린 게 왜 나여야만 하냐고 분노하다가도, 내가 매사 과민한 탓에 암을 피할 수가 없었다고 자조하는 야누스가 되어있었다. 매일 그 사이를 진동하며 왔다 갔다 분열하고 말 것 같았다.


권여선의 진실은 표면상 술이라는 입구로 진입해야만 보이는, 경계가 흐릿한 세상 속에서 발견되지만 깨어도 너무 선명하다. 나는 환자(patient)다. 이 불행과 고통을 참아내야(be patient) 한다. 참아낼 힘을 주소서, 라고 기도하며 읽어가다 대체 어디에 기대야 당신이 선사한 이 비극을 견뎌낼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술이나 한잔하라고? 난 간을 잘라내 이제 술도 마실 수 없다.


단편 [봄밤]에서는 영경과 수환이라는 두 인물이 각자 치명적인 질환과 싸우며 사그라져 간다. 가난하고 병든 연인 둘이, 서로에게 채워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둘이 사랑에 기대어 우연히 던져진 불행에 맞선다. 그들은 가진 게 없어 마지막 생명의 불씨를 서로를 위한 배려로 써버리고 싸늘히 식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비웃는 운명의, 신의 주사위 놀이에 이렇게 맞서고 버텼다. 지지 않았다.


단편 [이모]에서는 평생 자신을 묶어두고 갉아먹은 가족으로부터 나이 50이 되어서야 벗어난 이가 가진 돈을 전부 써버리고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그 착취당한 생애 50년의 보답으로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아들었다. 보호를 받았어야 할 가족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그녀의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했을까? 결국 자신을 향해버렸겠지.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하지만 주인공 이모는 어느 날 문득 떠올린다. 자신에게 연정을 품은 남자와의 술자리에서 그가 내민 손에 담배를 비벼 껐던 일을. 그땐 그저 귀찮아서 그랬다는 것도 함께 상기한다. 그리고 이제 그 귀찮음으로 저주받은 생을 마주하리라 결심한 것 같다. 그 차가운 결의가 어떤 경지인지 솔직히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그녀는 2년을 더 살다 죽었다. 당초 결심대로 남은 돈을 다 써버리고 죽으려 했어도 그 정도 걸렸으리라. 다만 그 2년은 내면을 향한 총질의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숭고한 인간의 면모를 살짝 보여주며, 불행과 죽음에 맞서는 한 가지 방법을 일러주었다.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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