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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칠순잔치와 식탁 위의 시간 여행

by 혁이아빠


전 국민이 한날한시에 어버이 은혜에 감사를 표하자니 조용하던 전주 시내 곳곳도 북새통을 이루었다. 찾아가 뵈어야 마땅한 아들이 아직 부실하여 부모님께서 아들에게로 오셨기에, 식사라도 번듯한 곳에 모시고 싶었건만. 집 근처 한정식집의 방은 이미 꽉꽉 예약이 들어차 있었고 홀 구석자리 나마 어렵사리 얻었다. 저녁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천방지축 아들이 있다고 간곡히 부탁하여, 직원분들이 쉬시는 방에 겨우 상을 차렸다.


생신을 음력으로 쇠시는 어머니는 늘 아쉬움이 컸다. 초파일 다음 날이라 부처님 생신에 밀려서는 아니었다. 어버이날이 늘 인근인 탓에 어버이날에 생신까지 한꺼번에 퉁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솔직해서 참 다행이다. 당당히 어버이날과 생일은 별개라며 늘 따로 생각해달라 주문하신다.


칠순. 환갑과는 달리 만 60세가 아니라 우리 나이 70에 해드려야 하는데 작년에 이미 지나가고 말았다. 어리석은 나는 올해가 칠순 아니냐며 어찌할지 상의하려고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부끄럽고 민망해져 버렸다. 작년 어머니 생신엔 내가 수술한 뒤 경황이 없던 터라 잔치는 못했지만, 형이 적절하게 성의 표시하면서 보냈더라.


뭐 까짓것 만 나이로 전 국민이 바꾸는 김에 만으로는 올해가 70이시니 칠순 한 번 더 하자고 했다. 쿨한 어머니. 작년에 받고 싶었던 선물을 콕 집어 말씀하신다. 고민을 덜어주시는 어머니 덕분에 여러 곳을 유리방황하지 않고 직진해서 바로 준비할 수 있었다.


당초 계획한 것은 여행이었다. 그것도 무려 서로가 살고 있는 포항과 전주의 가운데쯤인 남해. 가운데가 아니라 둘 모두에게 가장 먼 곳이라는 게 맞겠다. 하지만 사전 예행연습 삼아 가본 제주도 여행 이후 드러누운 나는 양해를 구하고 여행을 취소했다. 멀리까지 가서 힘에 부쳐 돈 쓰고 인상 쓸 수는 없었다. 차라리 그 돈 아껴 선물과 식사에 집중하고 웃으며 보내자 했다.


사실 부모 자식 간이지만 늘 긴장이 흐른다. 아들에게서 지우고 싶은 나를 보는 것만큼, 내 모습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보는 것도 힘들다. 맥락 없이 옆에서 그냥 보면 그저 복스럽고 사랑스러운 모습마저도 그렇다. 배가 부르다면서도 싹싹 먹어치우는 모습이랄지, 먹는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하며 이거랑 이걸 같이 먹어봐라, 저거 맛있는데 왜 안 먹냐, 이거 얼마냐 등등. 삼대가 둘러앉은 훈훈한 밥상머리 풍경은 밖에서 보면 마냥 좋아 보이지만, 내게는 그 위에 삼십 년 동안 누적된 밥상 풍경이 함께 떠오른다. 그 시간 동안 누룽지처럼 눌어붙은 복잡한 감정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결국 그 긴장 탓인지 점심 먹고 산책 한번 하고 나니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저녁 먹기 전까지 한참을 누워 쉬어야 했다.


한 공간에 눌러앉은 수십 년의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벌려본다. 인터스텔라에서 딸의 방이라는 공간 위에 펼쳐진 수많은 시간 속에서 딸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매튜 맥커너히의 몸부림이 떠오른다. 싫어하는 반찬만 쏙쏙 골라 밥 위에 얹어주시던 그 손길과 주눅 들어 깨작거리는 어린 형과 나의 모습 위에, 아침부터 풍기는 고소한 삼겹살 냄새가 얹힌다.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 밥해 먹일 시간은 아침뿐이라며 아침부터 삼겹살을 굽고 내가 좋아하는 마늘장아찌를 잔뜩 올려주셨지. 감사한 기억은 보관 기간이 짧고 섭섭했던 기억은 이상하게도 영구보존이더라.


이번에도 식탁의 풍경은 비슷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머물러 있는 시간의 좌표는 각기 달랐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를 보며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계셨을까? 아니었다. 다행히 두 분의 시간은 지금이었다. 오히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식탁 위에 앉아있었다. 그 시절의 나처럼 부모님의 이런저런 오랜 습관들이 여전히 불편했고, 잠깐잠깐 몸만 어른이 되어 부모님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칠순이 된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다. 철저히 지금을 살고 계셨다. 아니 그렇겠는가. 이제야 비로소 생계의 부담이며 속세의 갖은 의무들을 내려놓고 아침엔 꽃따라 저녁엔 노을따라 즐겁게 걷는데. 귀는 적당히 들리지 않아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불필요한 소리들을 듣지 않아도 된다.


잠시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았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5세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간다. 자리 잡은 성북동에서 초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시고 미용실에서 시다로 일하기 시작하며 6남매의 맏언니 생활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시작했을 그 미용업은 어머니가 내 나이쯤 되었을 무렵에야 끝났다. 그때까지 한 달에 이틀 쉬었다. 어머니의 전공은 드라이였다. 그 쉼 없는 드라이기 소리가 어머니의 청력을 일찌감치 좀먹었을 것이다.


손재주가 좋았던 어머니는 미용실을 접은 뒤에도 쉼이 없었다. 2년 정도 제빵, 꽃꽂이, 분재, 지점토 등을 돌아가며 배웠다. 분명 취미로 시작했지만 규모는 업으로 하는 것에 가깝게 부지런히 몰두했다. 곧 IMF가 왔고, 어머니는 보험설계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년간 서비스업에 종사해오신 어머니는 처음 보는 이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마침 국내에서 사양산업이 되어가던 섬유업을 접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다시 생계를 책임졌고, 나는 무사히 대학교육까지 마칠 수 있었다. 지금 그 일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떠나지 않은 고객은 물리치지 않고 여전히 예전 방식으로 전화와 팩스로 관리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시간은 지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어머니는 어느 순간인가 따라가기를 적당히 멈추셨을 것이다. 그저 어머니가 더 이상 어렵게 배우며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수준으로 편리한 시간에 머물며 지금의 공간을 살고 계실 것이다. 가끔 아들 집에 이렇게 놀러 올 때면 신기해 보이는 것들을 묻곤 하시지만, 아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실 것이다. 물건을 지르시는 경로는 주로 TV 홈쇼핑이고, 카카오톡은 쓰시지만 모바일 쇼핑은 여전히 어려워하시니 한 10년 전쯤일까?


반면, 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두 발을 걸친 채 부지런히 두 시간을 오가며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회한이 문득 스미는 것을 보면 과거청산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생계의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내려놓을 수 없다. 오롯이 지금에 집중하기엔 아직 젊은 것일까? 어머니가 도달한 저 칠순의 고지에 올라서면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이 행복하다고.


정말 다행이다. 결국 어머니가 건강하게 살아남아 편한 시간대에 머물며 행복하다 말할 수 있어서. 그저 앞으로 계속 누리시라, 누리고 또 누리시라, 그럴 권리가 있으시다 당부드렸다. 한 공간에서 시간을 누적해왔던 가족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버지 어머니의 차에 손을 흔들고 나서 돌아서니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20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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