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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서 만났던 샴푸의 요정에게

by 혁이아빠

지난 일기다. 일요일이지만 노동절이었다. 나는 노동을 했다. 농사에는 휴일이 없다. 특히 나는 주말과 휴일에만 농사를 짓는다. 그 핑계를 댈 일은 아니지만 하여간 잊고 넘어갈 뻔했다. 몸에서 흙을 씻어내고 저녁 뉴스를 보면서 비로소 오늘이 노동절이었음을 깨닫는다.


내 월급날은 25일인데, 난 월급날을 즈음하여 이발을 한다. 무사히 월급을 수령한 나를 대접하는 최고의 가성비 선물이 이발이기 때문이다. 산뜻한 헤어 능선도 좋지만, 사실 내심 기대하는 것은 샴푸 시간이다. 샴푸를 해주는 사내의 두피와 어깨 마사지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살게 되면서 지금 다니는 미용실에 출입하기 시작한 것은 1년 전. 그는 6개월 전쯤 나타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만남에서 그의 두터운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은 사이즈의 내 대두를 손아귀에 쥐고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샴푸가 끝날 때까지 황홀했다. 바로 그의 근무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그가 없는 날 이발하러 오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두세 번쯤 그의 샴푸를 받고 나서 너무 감동한 나머지 또 말을 걸고 말았다. 두피 마사지를 업으로 해보시는 것은 어떻냐는 나의 농담조 질문에 그는 손아귀며 어깨가 욱신거린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직 이걸 업으로 해볼 생각은 못 해봤다고.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데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질문한 것이 부끄러워 머리도 잘 하시게 될 것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묻자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내 커트를 해주던 헤어디자이너는 그가 계속 이 업계의 일을 계속할지 잘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직 커트를 못하고 샴푸만 했던 그였기에 단지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 되어 그만두거나 일터를 바꾼 것이 아니라, 업 자체에 회의를 갖고 그만둔 것으로 짐작된다.


무시무시한 악력에 성실과 친절도 갖춘 것으로 보였던 그였기에, 그가 관둔 것이 미용실에서도 충격이었나 보다. 문득 그 말을 듣고 둘러보니, 내 머리를 잘라주고 있는 디자이너 외에는 낯익은 얼굴이 하나도 없다. 그 말고 다른 스텝(옛날엔 시다라고 불렀지)들도 자주 교체되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최근 보았던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젊은이들이 부장님의 사소한 실수 하나하나마다 그냥 넘어가지 않고 사표를 내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콩트가 좀 불편했다. '요즘 것들은 책임감이 떨어져. 조금만 힘들어도 관둔다고 하지. 도무지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없어.'라고 혀를 끌끌 차며 내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달까.


미안하지만 책임감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 젊음들을 초대한 것은 그 중년들이다. IMF 이후 비정규직이란 말이 막 회자되던 당시 대학을 입학했는데, 어느덧 20년 넘게 흘렀다. 수법은 갈수록 악랄해졌다. 2년을 채우지 못하도록 23개월마다 사표를 받던 것도 옛말이다. 요즘은 공공분야 외에는 정규직 공채 자체가 없다. 어디서나, 처음엔 비정규직이지만 열심히 하면 정규직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가스라이팅 하면서 등골까지 빼앗아먹는다.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책임감까지 바라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고용하는 입장에서만 유연하고 싶었던 그 제도를 이용해 이제 피고용인들이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 가장 바쁠 때 당당하게 사직서를 던져보는 것이다. 통쾌하지 않은가. 이렇게 작동하라고 만든 제도를 있는 그대로 활용한 것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당황하는 어른들의 반응이란 게 고작 꾸짖고 개탄하는 모습이니 참 안타까웠다.


떠나가는 그 마음들을 나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짐작해 볼 뿐이다. 잠시 지쳤을 수도 있고, 더 나은 자리로 옮긴 것일 수도 있다. 처음 만난 손님에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답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너무 좁아보였을 수도 있겠고.


다만, 부디 책임감에 너무 짓눌려 있지 말기만을 바란다. 열악하게 대우해주던 그 전 직장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감에 이미 충분히 어깨가 무거울테니.


라떼는 다 그렇게 일을 배우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은 이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맞다. 지금 60대 이상이라면 그런 말씀 하실 수도 있겠다. 아무 것도 없던 이 나라에서 고생 정말 많으셨다. 근로기준법도 잘 몰랐고, 있었어도 지켜본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젊은 친구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났다. 넘지말아야 할 하한을 알고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권리임도 알고 있다.


다시 그 샴푸의 요정을 길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다면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까. 전에도 잘못된 질문을 했던 터라 마음이 조심스럽다. 그저 새롭게 시작한 그의 노동이 하루하루 사표를 만지작 거릴만큼 견뎌내기 힘든 것이지 않기만을 바란다.

(20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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