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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Feb 22. 2023

배를 열고 닫기까지

간 쓸개 다 내주다. 간내담도암 발견부터 수술까지 #12


1년 전 발병부터 수술까지. 벌써 희미해지는 기억을 대신하기 위한 기록



내면이 그렇게 요동치던 사이 수술 전 필요한 다양한 검사도 이뤄졌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검사는 없었겠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PET-CT. 이 검사는 쉽게 말하면 방사선을 입힌 포도당을 주입하여 1시간 뒤 위치를 찾는 것이다. 정상세포보다 훨씬 강력하게 포도당을 끌어당기는 암세포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앞으로는 피에 잉여 포도당이 많이 흐르면 곤란하겠구나 싶어. 다행히 전이도 없었고, 간도 일부를 절제하더라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들었다. 이것으로 수술대에 오를 준비가 되었다.


수술시간은 아침이었다. 수술실로 옮겨가는 동안 행복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길 간절히 원했지만 내 마음은 아직 분노와 원망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했다. 나를 수술대 위에 오르게 만든 장본인들을 하나씩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쉽게도 현행법에는 그들을 기소할 적당한 죄목이 없다. 암유발죄로 법정에 세워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형벌로 엄히 다스리고 싶은데.


차디찬 촉감의 수술대 위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수술 전날 소상한 설명을 들었다. 종양의 주변부까지 넉넉하게 왼쪽 간을 절제하고, 절제된 면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으면 배를 닫는다고 했다. 꽤 긴 시간이 되리라 생각하며 스며오는 마취제와 싸우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다. 꿈은 없었다.


깨어나니 무척 추웠다. 아니 추위보다는 아픈 것이 먼저였다. 통증으로 몸부림치고 고함을 질렀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누군가 와서 어떻게든 견뎌내라고 했다. 이미 정량의 진통제를 넣은 상황이라 더 줄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은데 지금은 잠들 권리가 없다고 했다. 무조건 깨어 고통을 직접 맛보고 있어야만 했다.


좌우를 돌아보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몸들이 여럿 누워 있었다. 회복실이구나. 나처럼 몸의 어딘가를 잘라내야 했던 사람들이 매일같이 여럿 나오는구나. 나에게만 내려진 것이라 믿었던 천형은 사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가깝구나. 저 중에 나보다 더 젊고 그래서 더 원통한 사람도 있겠지.


진단했던 영상과 뱃속 실제 상황이 다르면 절개하지 않고 그냥 닫는 경우도 생긴다던데, 시계가 없는 하얀 방에선 수술에 걸린 시간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수술은 끝낸 것인가? 사라진 덩어리의 빈 자리는 지금 느껴지는 이 통증이 채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아픈 곳은 사라진 간이 있던 자리가 아니라 분명 허리였다. 극심한 허리 통증에 몸을 배배 틀며 자세를 고쳐 잡아보았지만, 통증은 잡힐 기미가 없었다.


잠시 후 병실로 옮겨지며 그 이유를 들었다. 6시간 이상 고정된 자세를 취한 채로 개복수술이 진행된 탓에 허리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다. 병실에 도착해 침대로 옮겨지고 난 뒤 아내는 쿠션이며 베개, 수건을 총동원해 허리를 받쳐줄 작은 산을 만들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겠다. 아내는 내 비명의 데시벨로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 가며 쿠션의 위치를 바꾸었다. 병과도, 목숨과도 무관한 허리와 싸우느라 정신이 혼미해지는 동안, 일부분이 잘려나간 간은 되려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열심히 회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의료진은 1시간 동안 잠들지 말고 버티라는 당부와 함께 병실을 떠났다. 난 마약성 진통제 버튼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아프다고 빠르게 눌러보아도 일정한 간격으로 정량만 투여된다. 지금 진통제를 누르면 정신이 더 혼미해져 잠과 싸우기 어렵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통증과 졸음, 얼핏 보면 양립하기 어려운 이 두 가지와 동시에 싸우자니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손을 흔들면 아내가 거즈에 물을 적셔 입술을 훔쳤다. 어느 순간인가 나는 입술로 거즈를 물었다. 거즈에 남겨진 물기를 입술로 짜내어 마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신포도주로 입술을 적시던 이 순간 어떤 기도를 했을까. 끝까지 참아내라고 명령 받은 한 시간을 그렇게 힘겹게 채우고서야 겨우 잠들 권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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