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소설, '백의 그림자', '아무도 아닌'을 읽고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 '아무도 아닌'을 열면 이 문구가 나온다.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 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이게 황정은 작가의 책들을 열어보게 만든 열쇠말이 아니었나 싶다. 소위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다고 말해주는 책이구나, 싶어서.
장편 '백의 그림자'는 쇠락해가는 전자상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생계를 책임지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부품이나 수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밥을 먹고, 사랑을 한다. 하지만 재개발 되어야 할 상가처럼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기 일쑤인 그들 뒤에는 '그림자'가 일어선다. 어찌보면 작품 속 그림자를 불행으로 직역할 수도 있겠다. 신형철 평론가는 '환상적 상관물'이란 표현으로 설명했지만^^.
작품 속 그림자는 빛을 따라 나를 좇아다니는 수동적이고 자동적인 음지의 영역이 아니다. 내 삶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불행이 다가올 때 스르르 일어나는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사람들은 그림자가 일어났다고. 그것을 따라가면 안된다고 수군대지만, 그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론가 신형철은 '백의그림자' 말미에 붙인 비평에서 이 작품이 '불행의 단독성'을 살려내었다 상찬한다. 전자상가의 철거라는, 구도심에서 곧잘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건을 문학을 통해 일반적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문과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들. 그 불행은 곧잘 분류되고 분석된 뒤 제도개선이라는 정책적 함의 도출로 마무리가 되곤 하는데, 이런 식의 과정은 그 불가해한 불행을 사회가 소화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그 하나의 우주가 사라진 충격에서 헤어나오고 내일을 다시 굴려가기 위해서는 그 불행을 익명화하고, 소를 beef라 하고 돼지를 pork라 하듯 다른 이름을 붙여 거부감을 줄인 뒤 처리해야 하기에.
단편 모음집 '아무도 아닌' 도 같은 맥락에서 도처에 널린 불행들을 모아두었다. 마음같아선 내용들을 조금씩 요약해 소개하고 싶지만.... 요약은 예의가 아닌 듯 싶다.
백의 그림자가 그림자를 통해 조금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취하고 있다면 '아무도 아닌'은 매우 리얼하다. 그 각각의 치환할 수 없는 고유의 불행에 몸서리쳤다. 선진국으로 가는 대한민국의 그림자이기에 가려져 있던 불행들을 대놓고 쇼윈도에 걸었다. 작가가 세묘하는 불행들은 늙기도 했고 무척 젊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 작가로 오해했다. 나보다 누님이더라.
텍스트의 해석은 독자 몫이라 했던가. 내 경우엔 그림자가 '암'으로 자꾸 읽히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백의 그림자'에선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파고를 만날 때, 삶이 주는 긴장이 속살로 파고들어 응축되고 응어리가 될 때, 그 존재가 외로움에 사무칠 때 그림자가 일어선다. 그리고 난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을 '암이 또아리를 튼다'로 읽는다.
생각해보니 정말 암이란 병도 불행을 닮았다. 실은 매우 개별적인데, 도처에 너무너무 흔해서 분류하고, 5년 생존율이란 이름으로 희망(그 수치가 낮다면 절망)을 덧칠한다. 뉴스에선 좋은 항암제 나와서 평생 관리할 수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이해시킨다. 그래야 견딜만한 것이 되고 더불어 살만한 것이 된다고 생각하나보다. 그래서 안걸려본 사람들과 걸려본 사람들 사이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뉴스의 필터로 암을 본 사람들은 그 개별성의 결을 모른다. 외부의 바이러스가 들어와 일으킨 병처럼 좋은 약이 나오면 다 치료할 수 있는거 아니냐며 일반화한다. 요즘 약 좋아졌지 않냐고 위로하기도 하고.
아니. 암은 자신의 세포가 변한 것이다. 우리가 개별적인 존재라고 하는건 지문이 다 다르고 DNA가 다 다르기에 서로를 다른 존재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당연히 그만큼 암세포도 개별적이야. 약도 그 반응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부위별로 다 다르고 같은 부위라도 사람별로 다 달라. 제발 뭉뚱그려 이해하고 대강 위로하진 말아줘 그건 당신이 이해하기 편하려고, 당신이 듣게된 내 불행을 소화하고 잊으려고 하는 행동이니까.
책을 읽다보니 이렇게 여전히 까칠한 나를 본다. 하지만 이 과정 없이 암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지금은 수술로 떼어냈다거나 항암으로 관해되었다 한들 언제 다시 그림자처럼 고개를 쳐들지 모르는 이 암세포와의 긴 동행을 위해선, 필요하다. 이것이 나만 알고, 내게만 국한된 것이기에 고유명사를 붙여야 마땅한 친구라는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간이.
그리고 이 과정을 겪고 나면 타인의 불행을 받아들이는 법도 조금은 알게 된다. 도처에 가득한 불행을 계량화하거나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충 환원하고는 이해했다 말하기 주저하게 된다. 나아가, 불행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암도, 불행도, 도처에 가득하다. 애써 가리고 있을 뿐. 그 환부를 드러내 준 황정은 작가에게 감사한다. 생각할수록 암은 유전자의 변형, 면역의 저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적인 병이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