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웃음이 남겨준 숙제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될때(When breath becomes air

by 혁이아빠

웃어라. 웃어야 치료된다. 웃을 때는 광대를 힘껏 올리고 입도 조커처럼 좍 찢는다. 소리 내어 웃으면서 횡경막을 자극시킬 정도로 깔깔 웃어야 한다. 웃어라. 이건 루틴으로 매일 수행해야 할 치료다. 약 먹듯 정해놓고 억지로 웃어라. 웃음이 어찌 매일 나오겠나. 그래도 근육을 움직여 웃으면 뇌가 속는다. 도파민이 나오고 암은 점점 살기 어려운 여건이 조성된다.


암환자나 보호자라면 수도 없이 들었을 말이다. 나도 정말 여러 번 실천해 보았다. 평소 보지 않던 코미디 프로를 저녁마다 틀어놓기도 하고, 고요한 아침 미친놈처럼 혼자 손뼉을 쳐가며 웃는 소리를 내보고, 도저히 웃을 수가 없을 땐 소위 '최불암 웃음'을 흉내내며 횡격막과 성대를 마구 떨어보기도 했다. 억지스럽고, 힘들다.

웃어야 할 의무라니. 그래도 웃겨야 하는 의무보다는 낫지 않은가. 실행에 옮겨보면 정말이지 난감하다. 하나도 웃기지 않는 어느 날 아침. 초췌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서 웃는 훈련을 하다, 올드보이처럼 억지로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슬퍼서 그만 웃다가 울어버린 적이 있다. 합쳐서 웃픈 건가? 웃퍼? 그런 가벼운 표현으론 이런 상황이 충분히 대변될 수 없다.


차라리 슬픈 감정을 실컷 토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웃음을 멈출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스탠딩 코미디언 조커처럼, 웃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리는 무척 위태롭고 울고 싶은 공기로 둘러싸여 있다. 정말이지 요즘은 조그만 자극에도 눈물이 터져 나온다. 지극한 슬픔에 실컷 울어버리는 게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감정을 누르지 않고 길을 터주는 게 건강에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차오른 슬픔엔 억지웃음 보다는 눈물이 약인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최근 최루탄이 하나 떨어졌다. 바로 이 책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친구와 간만에 연락을 주고받다가 추천받았다. 그 친구가 이 책의 영어 제목을 말하지 않았더라면 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When Breath becomes air." 2016년 발간된 이후 스테디셀러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기에 읽어본 분들이 많겠다. 뇌종양을 치료하던 의사에게 찾아온 폐암. 막 피어나려던 꽃봉오리는 2년여 간의 투병 끝에 지고 말았기에, 책은 그의 아내가 완성하여 발간했다.


작가는 사실 소위 천재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하다가 영국에서 의학을 다시 공부하고 다시 스탠포드로 돌아와 전공의 수련과정을 거친다. 그래, 정말 아까운 인재였구나. 삶은 정상으로 향하는 듯했고, 그래서 암이라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낙차 폭도 그만큼 컸겠구나.


그런 천재가 피어보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한 것 자체가 안타까움과 연민을 자아낼 수 있겠다. 그리고 소위 스토리가 된다. 독자들은 그런 고귀한 주인공이 암이라는 시련을 만나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꿋꿋이 끝까지 살아내는 것을 응원하다가 삶이 질 때 눈물짓겠지.


하지만 평범한, 아니 좀 모자란 필부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고 성장해 세상에 내던져졌다가, 그저 살기 위해 빠르게 돌아가는 연자방아에 매달려 힘껏 발을 구르던 중에 암이라는 암초에 걸려 쓰러졌다면. 가족은 소득이 끊긴 그를 버렸고, 홀로 남은 그는 가족의 온기마저 느끼지 못한 채 냉골에서, 혹은 허름한 요양병원에서 숨이 말라간다면.


너무나 사실적이라 불편하겠지. 아니 몸서리쳐지겠지. 그의 죽음은 아름답지도 않고 추출해 낼 이야기도 없다. 부조리하고 가차 없는 생에 맞서, 싸워보지 못하고 쓰러진 평범한 죽음일 뿐,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만한 그 무언가를 제공해주기 어렵겠지. 오히려 내 삶도 그렇게 될까 두렵고 도망치고 싶겠지.

그래서 난 이런 책 잘 안 읽었었다. 억울한 죽음마저 고귀하고 아름다워서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런 작가에 비해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일까 싶어.


그는 떠나가는 와중에도 몇 달 남은 그 어렵다는 전공의 수련과정을 끝까지 마쳤고, 그의 손은 놀라운 외과수술 기술만 가진 게 아니라 아름다운 언어를 써 내려가는 기술도 갖추었다.


우선, 앞부분은 그의 성장기이다. 의사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애리조나 사막으로 이사 가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배우며 사랑 속에 성장기를 보냈다. 생계의 걱정 없이 그저 생의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 문학일지, 의학일지를 저울질하다가 문학 먼저 배우고 의학에 투신했다. 그림자나 구김살도 없었다. 나중에 책 맨 뒷장 사진을 보고 알았다. 그는 인도계 미국인이었다. 그 흔한 인종차별적 상황 속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순간도 드러나지 않았기에 그가 그저 앵글로 색슨계 미국인인 줄 알았다.


투병기에 이르러서는 중간에 책 속으로 들어가 그를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어찌나 미련한지. 의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항암 후 잠깐 암종 크기가 줄었다고 다시 일을 미친 듯이 하나.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는가. 문화적인 차이도 있겠지.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더라. 그저 전과 다르지 않게 출근하고, 역할을 다하다가 며칠 뒤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그게 미국인의 특성이라더라. 암 선고를 받으면 일단 일상을 내려놓고 치료에 전념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는 너무 무리한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통증, 그 통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법한 사람이 계속 진단받는 것을 미적거린다. 그리고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한 이후에도 되려 전공의 수련을 마치기 위해 전과 똑같이 매진한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오히려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기에 더 마음이 조급했을까.

그렇게 냉정하게 읽어가다가 그만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책 말미의 사진 속 그의 미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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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연습해보지만 어렵던 그 웃음. 사진 속의 그도 웃고 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을 시점이다.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확인한 후에 출산을 결심한 아내, 그 결실로 태어난 소중한 딸. 그들을 두고 떠나가야 하는 그가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옮긴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웃지 않으면 울어버릴 것 같았기에. 웃다가 우는 그 기분을 옮긴이도 아는 걸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울어버릴 것 같아서 웃는 그런 표정은 아니다. 문학도로 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다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뇌를 연구하기로 한 저자. 하지만 그도 죽음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생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종점이 보이는 그 순간에야 생은 비로소 반짝이는 걸까.


저 웃음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의미는 무얼까 이해하고 나면 서평을 남기려 했었다. 하지만 숙제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저자와 같은 고귀한 천재가 아닌, 죽음을 앞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저런 미소를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조금이나마 초연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매일 아침 웃음훈련도 조금 자연스러워지겠지.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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