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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일기2> 오늘도 잘 자보겠습니다

by 혁이아빠

어제는 서울 출장을 마치고 늦게 돌아와 나름 꿀잠을 잤다. 꿀잠을 위해 그간 저녁마다 의식처럼 행해오던 루틴이 있긴 하다. 구구절절하지만 다음과 같다.



1. 필라테스를 하고 헬스장에서 뜨끈한 탕에 몸을 담가 긴장을 풀고 8시 반~9시 사이 귀가한다.

2. 아들과 잠시 놀아주고 9시 반쯤 방에 들어가 은은한 백열등만 켠 후, 옷을 정비하고 가습기를 채우는 등 취침 점호 준비를 한다.

3. 10시가 되면 세라젬 위에 눕는다. 마사지를 받으며 아들을 재우고 해방된 아내와 그날의 대화를 두런두런 나눈다.

4. 졸리면 자고, 안 졸리면 책을 더 읽는다.

5. 물론 이렇게 바람직하게 루틴을 준수하고 마침내 잠드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이 루틴은 일정한 생체리듬을 유지하여 불면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빛을 차단하는 것도 필요하다. 빛이 없어야 송과체에서 멜라토닌을 스멀스멀 토해내기 때문. 남의 집이라 커튼 하나 달기도 어려워 안대를 샀다.

​물론 이걸 다 지켰어도 잠들기 쉽지 않은 것은 뇌가 과잉 각성된 상태에서 도무지 꺼지질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약의 도움을 받는다. 쿠에타핀정. 12.5mg 저용량으로 사용하면 수면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결국 이 녀석과도 이별하는 것이 목표지만, 벤조디아제핀을 중단하며 겪은 금단증세를 이기게 해준 고마운 약이다. 초반엔 궁합이 잘 맞았는데, 요즘은 새벽 3시면 깨는 것을 보니 약발이 좀 떨어지는가보다.



아침에는 커피를 한 잔 맛있게 내려 먹었다. 혈액암 4기를 이겨내시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장인어른 친구분께서 주신 원두를 꺼내어 갈면서 향기에 취한다. 아침엔 코티졸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커피로 눈 뜨는 것은 좋지 않단다. 코티졸 기운이 사그러드는 11시쯤이 커피 마시기 좋은 시간이다.



불면증 환자가 팔자 좋게 커피 마시고 있냐고 핀잔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것도 살자고 하는 짓이다. 밤에 먹는 약 때문인지,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탓인지,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오후부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몇번 끊으려다 실패한 이유다.



고비는 5시이다. 피곤이 몰려오고 한숨 자고 싶은 유혹이 가장 강렬하게 밀려온다. 오늘은 특히 유난스럽다. 서서 책 읽으며 버티다가 잠시 앉았는데 그 사이 한바탕 낮꿈을 꾸었다. 서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며 버텼다. 차라리 산책을 다녀올 것을.


이쯤 되면 하루를 살기 위해 살았는지, 잘 자기 위해 버텼는지 혼란스럽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의 하루 루틴은 잘 자는 것을 목표로 조직되어 있으니 잘 자기 위해 사는 셈이다. 이러길 몇 개월째인가. 아, 이렇게 집착하면 숙면과 멀어지는데!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는다.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었다. 빌려 읽고 감동이 가시질 않아 소장하기 위해 주문했다. 나도 중얼거려본다.



<잘 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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