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일기 44>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독서해보니

2023.3.10,

by 혁이아빠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책 읽는 것이 개중 몸의 에너지를 가장 덜 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팔과 눈만 필요하니까. 게다가 앉아서.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컨디션이 좋을 때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독서였다.

문제는 몰입이었다. 제대로 읽으려면 몰입이 필요한데, 몰입은 비축된 에너지가 대단히 많아야 가능한 일인 것 같다. 남은 에너지를 닥닥 긁어 써버리고 난 토요일 아침. 간만에 스타벅스에 앉아 아침 한상에 커피까지 차려먹고 책을 볼까 했는데,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

한 챕터 겨우 읽으니 눈이 컴컴해지면서 졸리는데, 억지로 부릅뜨니 눈이 활자 위를 주르르 흘러내린다. 간만에 책갈피를 자 삼아 시험 앞두고 교과서 암기하기 위해 읽듯 한 줄 한 줄 가려가며 읽어보아도 소용이 없다.

단어의 용례를 찾아보겠다며 휴대폰을 켜고 검색을 하다가, 그 주제에 대해 참고할 만한 글을 썼던 이가 생각나네. facebook을 열어 그가 남겼던 글을 열람하려다 스크롤을 내리는 사이 이쁜 욕조 인테리어 광고가 잠깐 끼어든다. 반신욕하기 좋아 보인다. 그래 내가 또 반신욕 사랑하지. 정신 차려보니 조적 욕조를 검색하고 이미지를 뒤지며 장단점을 다 찾아보고 있다.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결론까지 내리고 휴대폰을 접으니 현타가 밀려온다.

이것이 그 조적욕조. 물 엄청 쓰게 되고 빨리 식는단다.

전주로 향하는 ktx 안. 역시 책을 펴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열차에 오르기 전 내 앞에서 줄 서 있던 사내의 책가방이 너무 예뻐 보여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그 백팩에 네이버 렌즈를 들이댔는데, 그 렌즈가 잡아준 쇼핑 리스트를 열고 있다. 어머, 명품이었네. 역시 내가 보는 안목이 있구먼. 루**통이여 심지어. 뭐? 가방이 400만원? 700만원? 허허.... 네이버 야 낮은 가격순으로 검색해 보자. 중국 기술로 완성한 가품들부터 우리기술로 거의 비슷하게 구현한 100만 원짜리 가품까지. 세상 참 대단하다. 어 사람들이 웅성웅성. 전주 다 왔네.

내일 읽자. 의식의 흐름 따라 소설을 쓰는 분도 있고, 의식의 흐름에 내맡기니 바로 소설 본문을 이탈하는 독자도 있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몸일기 43> 가눌 수 없는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