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원래 계획이랄 것도 없었지만 예상과도 전혀 다른 미션이 부과되었다. 혁이의 초청. 아빠, 게임하자.
옆에서 혀는 몇 번 찬 적이 있었다. 아직도 동양을 폄하하고 서구 열강을 숭앙하는 저 도시들의 배치가 가장 꼴 보기 싫었다. 끝 모를 자기비하와 사대주의, 아시아 디스카운트를 아이들에게 세뇌시키기 싫었다. 방콕 다음으로 베이징이 싸고, 세계 제1의 인구대국 인도와 파키스탄 쪽 도시는 아예 없으며, 아프리카도 카이로 홀로. 뉴욕, 파리, 런던, 로마 순으로 체류비가 비싸다.
게임의 전개도 놀랄만치 실제 삶을 닮았다. 땅의 임자가 없는 초창기에는 가급적 남이 밟지 않은 땅을 사 모으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그것은 실력과 무관하고 오로지 주사위 운. 그렇게 땅의 주인이 정해지고 나면 사실 게임의 승패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땅을 사고 나면 다음 자기 땅에 들를 때마다 자본 여건을 고려해 개발을 하는데, 무조건 호텔을 짓는 것이 장땡이다. 가급적 호텔비가 비싼 서유럽과 앵글로색슨의 도시에 몰빵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개발이 끝나고 나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지독한 지대추구형으로 게임의 양상이 바뀌는 것. 하는 일이라곤 돌아다니며 남의 땅에 호텔비를 지급하는 것인데, 상대 도시에 걸려 호된 체재비를 치르는 것보다 가만히 쉬는 것이 낫다. 그래서 3턴을 쉴 수 있는 무인도를 소망한다. 그게 승률을 높인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것도 배운다. 플레이어 한 명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되면 다른 플레이어가 양도양수할 수 있고, 은행에 매각할 수도 있는데, 남이 망해서 그걸 헐값에 사들이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다. 아빠가 호텔 집중투자한 도시에서 엄마가 파국으로 몰리자 혁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흐흐흐흐.
불행인지 다행인지, 혁이는 아직 남이 내 땅에 걸리면 좋아하고, 자신이 남의 땅에 걸리면 눈물이 찔끔 나는 수준으로 즐기고 있다. 자신의 자산총량에 대한 감은 잘 없다. 옆에서 어머니의 깨알 가르침이 이어진다. 혁아, 돈은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 되고 차분히 이성적으로 대해야 해. 지금 네가 아빠 땅에 걸려 쪼금 내 줬지만, 봐봐. 아직 네가 제일 부자야. 이내 표정이 밝아지는 혁이.
뿐만이랴. 자족을 모르고 끝을 보게 하는 것도 이 게임의 폐해이다. 어머니가 파산을 선언하고 게임을 정리하려 하자, 아직 아빠와의 대결이 끝나지 않았다며 울먹인다. 혁아, 지금 가진 것 돈으로 계산하면 아빠가 훨씬 많아. 계속하면 아빠가 이기게 되어 있고 혁이는 파산하게 돼. 그래도 계속하고 싶어? 혁아, 정신차려. 이건 게임이야.
이 악마같은 자본주의 게임. 삶도 이럴 거라 생각하면 큰일인데.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게임판을 그대로 두고 점심이나 먹기로 한다. 한숨 돌리고 나니 이제 다른 관심이 생겼는지 게임 그만하겠단다. 다행이다 싶은 찰나, 내가 뭐하고 있나 싶다. 멀리서 아내가 보기엔 게임에 과하게 몰입하는 것은 혁이나 애비나 똑같다. 게임은 게임일 뿐. 남자들이란. 애비도 정신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