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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어요, 첫 스타트업에서 피봇까지 하게 될 줄은

서비스가 망하는 패스트트랙과 피봇 과정에서 배운 점

by 람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좋고 나쁨을 떠나 어느정도 체계가 잡혀있던 조직에서 일을 오랫동안 하다가 처음 들어간 스타트업에서 참 다양한 경험을 했다. 법인을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B2B 스타트업이었고, 첫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영어 닉네임 사용, 애자일 프로세스, 스탠드업 미팅과 올핸즈 등 낯선 용어와 접해 보지 못했던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스타트업의 맛(?)을 알아가는 건 재미있었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수평적인 조직이구나!'라며 말이다.


내가 합류하고 곧 출시한 B2B 서비스는 승승장구 하는 듯 보였고, 유니콘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회사가 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빠르게 모았던 고객사 중 대다수가 이탈하며 서비스는 완전히 망했다. 성장세에 맞춰 규모를 키우던 회사는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긴 듯 권고사직과 자발적 퇴사로 반 이상의 직원을 잃었고 내가 처음 합류했을 때 수준으로 필수 인원만 남게 되었다. 1년 남짓 남은 런웨이에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결국 우리 팀은 피봇을 하기로 했다.

당시에도 여러 실패 요인을 이야기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특히 결정적이었던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B2B 프로덕트가 실패했던 세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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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업으로 고객을 확보한 후 각 회사에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몇 가지 핵심 기능을 개발한 뒤 영업으로 만난 고객사들이 가장 관심이 있었던 건 자사 비즈니스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고객의 특성은 어떤지, 어떤 상품이 잘 나가는지와 같이 감으로 어렴풋이 알던 내용들을 데이터를 기반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전략을 고객사가 스스로 프로덕트를 사용해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회사의 운영 매니저가 붙어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준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각 고객사의 분석과 전략에 대한 요구사항을 맞춤으로 제공하다 보니 우리는 자체 개발한 서비스를 활용하는 컨설팅 업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2. 명확한 근거없이 추측으로 기능을 추가했다.

운영과는 별개로 제품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쓰다보니 이런 게 불편한데?' 또는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아하지 않을까?' 와 같이 내부의 시선으로만 판단해서 다음에 추가할 기능들을 줄지어 놓고 개발했다. 1번에서 이미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과 더불어 우리만의 이상적인 분석 기법을 고정한 뒤 기능을 짜맞추는 실수를 저질렀다.


3. 근거없이 결정한 방향으로 계속 기능을 추가하며 공을 들였다.

2번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결정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 과정에서 인력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어느정도 완성도 있는 기능을 구현하려다 보니 개발 기간이 꽤나 넉넉하게 잡혔고, 복잡한 기능들이 많아 개발과 QA까지 하는 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대부분의 기능들은 너무 당연한 결과로 고객사에게 외면 당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고객사도 직원들도 잃고 나서 회사의 남은 인원들과 조금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제품 주도 성장'을 하자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근거없는 추측(이거 필요하겠지?)과 엎드려 절받기(이거 있으면 유용하겠죠?) 방식의 기능 선정이 아닌 방법으로 PMF를 찾고자 했다.


1단계. 남아있던 고객사가 사용하는 이유 파악

90%의 고객사가 이탈하고 남은 사용자에게 물었다. ’왜 이 서비스를 사용하세요?‘ 그들은 서비스에 보조 역할로 가볍게 넣어 둔 한 가지 기능을 마케팅 업무에 활용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착안하여 새로운 서비스의 방향을 정했다. 기존의 프로덕트 컨셉이 전략을 위한 “분석”이 중심이었다면, 새로운 컨셉은 “전략 실행“이었다.


2단계. 새로운 컨셉 검증

우선 정말 이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까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했다. 1단계에서 니즈가 있을 것 같은 새로운 컨셉을 잡았지만, 이것도 가설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검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고객에 맞는 비즈니스의 대표 혹은 마케터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The Mom Test라는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참고했고, 미국 시장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리워드 지급을 약속하고 콜드 메일로 인터뷰 참여 희망자를 모집했다.

*The Mom Test란 스타트업이 인터뷰를 할 때 지켜야 하는 원칙에 대한 내용. 엄마는 사랑하는 자식이 만든 서비스에 대해 그것이 좋든 나쁘든 칭찬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엄마 조차도 자식의 사업 아이디어에 대해서 사실만 얘기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대화 방법을 의미한다.


3단계. MVP 개발 후 사용성 테스트

어느정도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우리의 가설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 단계로 핵심 기능을 넣은 MVP를 빠르게 개발했고, 우리가 기대하는대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을지 UT를 진행했다. 시나리오를 주고 과제를 수행하게 한 뒤 사용자가 보여준 행동을 기반으로 인터뷰를 했다. 이 방법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는 서비스를 사용하는 방법을 시연한 다음에 세밀한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정말 간단한 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만으로 만든 제품은 실제 사용자가 기대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많았다. 덕분에 MVP를 조금 더 다듬어서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었다.





결과와 얻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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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메인 타겟은 쇼피파이라는 상거래 플랫폼에 입점해 있는 회사들이었기 때문에, 쇼피파이 앱 스토어에 등록이 필요했다. 개발한 프로덕트의 주요 핵심 기능에 대한 설명과 튜토리얼 영상 등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자료들을 준비했고 쇼피파이와 몇 차례 핑퐁 끝에 앱 스토어에 등록이 가능하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더 이상 컨설팅이 아닌 진짜 우리의 서비스를 SaaS로 사용해 줄 고객사를 찾기 위해 여러 영업의 기회를 찾아다녔고, 체험을 해보겠다는 회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이곳을 다니고 있진 않지만 회사는 출시 이후로 더 많은 고객사들을 모았고 잘 운영되고 있다.


기존의 서비스가 망하고 피봇을 하고 새로운 시장을 진출하기까지의 과정을 겪으면서 얻은 값진 교훈이자 마음가짐이 있다. 첫째, 안되는 걸 붙잡고 있기 보다는 실패를 인정하고 0에서 시작할 줄 아는 용기 둘째,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닌 지속가능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의 중요성 셋째, 완성도에 집착하지 말고 우선 빠르게 진행한 뒤 개선해 나가는 실행력.

속된 말로 먹힐 때까지 지치지 말고 쨉을 날리는 것, 서비스 기획자든 프로덕트 디자이너든 PM/PO든 직무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서비스를 굴러가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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