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먹하다 그냥
대학 졸업 후 신문사 등을 다니면서 글과 문서를 주로 다루는 일만 하다가, 유니폼을 입고 현장일을 하려니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름 듣보 신문사라도 '기자님' 소리를 듣다가 한 순간에 하루종일 박스만 뜯어대는 '일꾼 1'이 된 느낌이었다.
퇴근 후 일을 마치고 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있으면 "이게 맞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면서 몸뚱이는 일터로 향했으니 나름 적응은 잘하고 있었던 게 맞다. 세상만사 다 귀찮다가도 일터에 나가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몸을 움직여 일을 하면 우울할 틈이 없었다. 대놓고 험한 말을 하는 진상손님을 만나면 속으로 '181818'을 외치면서도,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작은 간식거리라도 챙겨주시는 단골손님을 만날 때면 그 성난마음이 부드럽게 가라앉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걱정은, 그 매장이 우리 집에서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아는사람을 만날까 걱정됐다. 원래 장기간 일을 하려고 마음먹은 곳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길게 일을 하게 됐다. 집에서 가까웠고, 내 몸뚱아리가 이미 그곳에서 적응을 해서 매우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 사장님께서는 "글 쓴다고 했지? 열심히 써. 꾸준히 써야 돼" 하시면서 응원도 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점점 안주하기 시작했다.
인근 도시의 지역신문사에서 일을 했기에 나는 '설마'했다. '설마 여기까지 그 사람들이 올까?' 정말 여기까지 오더라. 내가 일했던 매장은 나름 대기업 직영매장이어서 규모가 꽤 컸다. 직원도 여러 명이었고 나름 '득템 가능한 곳'으로 유명해서 타 도시에서도 손님들이 많이 방문했고 단골손님도 많았던 것이다.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하... 도망칠까? 걍 그만둬버려? 아는 사람 만나면 어쩌지?"
몰랐는데, **수련관 관장님, **교수님, **사장님 등 지역신문에 다니면서 직접 인터뷰를 했었던 몇몇 사람들이 이 매장에 자주 들렀다. 나는 매우 매우 민망했다. 혹시라도 저 사람들이 나를 알아챌까 나는 항상 고개를 돌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다들 나를 몰라보는 듯했다(모른 척했을 수도......).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000 형사였다.
지역신문사였지만 대표님과 이전 선배나 기자들이 일을 잘해놓았기 때문에 취재를 가서도 그렇게 무시를 받진 않았다. 지역의 마당발이었던 대표님 덕분에 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나는 유독 경찰서 출입이 어렵고 힘들었다. 분위기가 좀 삭막하기도 하고, 어떻게 형사들을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괜히 바쁜데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방해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서 적극적인 취재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와중에...... 무슨 시위, 집회라던지 사건이 터졌다고 할 때마다 현장에서 만나는 형사가 있었으니... 그는 000 형사라고 불리는 정보관이었다. 보통 형사들과는 달리 그분은 항상 멀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있었고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다니던 멋쟁이였다.
항상 눈은 ^^ 이렇게 웃고 있었고, 말투도 깔끔하고 상냥하신 분이었다. 무슨 인연인지 지역신문에 있을 때부터 일간지에 있을 때까지... 현장에서 꾸준히 마주치면서 유용한 정보도 많이 주시곤 했다. 듣보 신문사의 초짜 기자일 때부터 일간지 기자일 때까지 항상 편견없이, 변함없이 따듯하게 대해주셔서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 분이기도 하다.
그렇다. 항상 옷을 멀끔하게 잘 차려입던 000 형사는 이 매장을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카운터 밑으로 몸을 숨겼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빨리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고, 그 형사도 피하고 싶었다.
"아니 뭐야. 왜 여기서까지 만나는 거야. 쓸데없이"
나는 카운터 밑에 숨어서 그 형사가 빨리 이 근처를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건너편에 있는 직원분이 나를 향해 외쳤다.
"라미 씨! 거기 회색 코트 세 벌, 이 쪽 행거에다가 걸어줘요!"
나는 생각했다.
'왜... 하필 이때'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래도 대답은 크게 했다.
"네!"
그렇게 대답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 000 형사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정면으로. 그때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거였다.
'하.... 돌겠다 정말'
나는 모른척하고 싶었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어물쩍 넘어가고 싶었는데......
결국 형사님이 먼저 아는 척을 하면서 다가왔다. 여전히 ^^이런 표정으로.
"어! 여기 있었어?"
-"네... 안녕하세요"
".........."
-"............."
한동안 적막감이 흘렀다. 그 순간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했던 것도 잠시 그 형사는 자신이 골라온 재킷을 입어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이거 어깨랑 소매가 맞는 건가?? 이게 마음에 드는데 사이즈가 이거 딱 하나네"
-"어깨랑 품이 맞으니까 맞는 거예요. 소매가 좀 길긴 한데... 소매는 줄이면 돼요"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매장직원과 함께 그 형사의 옷 사이즈를 봐주고, 다른 디자인의 재킷까지 추천해주고 있었다. 그 형사는 마음에 드는 재킷을 하나 골라 구입했고 나에게 "잘 지내지?"라는 안부와 함께 "수고해요"라며 인사를 건네고서는 ^^ 이렇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청춘의 모습을 다 목격하신 분이신데 그날도 편견없이 나를 상냥하게 대해주고, 여전히 친절하신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괜스레 먹먹해졌다. 그 먹먹함이 ... 여전히 친절한 그 형사에 대한 것인지, 그 형사를 보고 피해다닌 나에 대한 것인지. 헷갈렸다. 그리고 퇴근 후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이거...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