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버린 생각

언젠가 저장해둔

by RAMI

나는 만년필 쓰는걸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그런 것 치고 고급만년필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쨌거나 그래서 만년필을 잘 관리하지는 못하는 편 인듯 하다.


10만원 이하의 만년필이 5자루 정도 있는데,

모두 다른 색을 넣어 사용하다보니, 특정 색은 자주 사용하지 않거나

시기에 따라 만년필을 쓰는 시기랑 맞물리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게되어 잉크가 촉을 막고는 했다.


어렴풋이 뭉친 잉크가 촉을 막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해체하여 세척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아, 여기서 세척할 마음이 들지 않은건 그게 그닥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아서 일지도.

어쨌거나, 그렇게 놔두고 사용할따마다 미온수에 촉만 살짝 담가 녹여 사용하고는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미봉책이었다.


유일하게 신경쓰며 관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고가이면서도,

대학원 입학선물로 아빠가 사주신 만년필이었다.

가격때문이라기보단, 한참 힘들었던 시기의 내가 그래도 혼자서 대학원을 준비하고 입학하게 되어,

아빠가 따로 멀리 나가 전문샵에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사오셨던거라 더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그 외에는 그렇게 막힌 잉크들을 그저 내버려두고, 언젠간 하겠지, 사용만 되면 됐지 뭐. 이런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지만, 속에는 하나의 짐이 되어 있었다.


요 근래 컨디션이 좋지않아, 감기로도 골골대고 있고, 힘들어 몸을 자주 움직이지 않는데도

지난 토요일 밤 10시, 별안간 만년필을 세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년필들을 다 끌어모으고, 미온수를 받아 세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30분이면 끝나려나 하고 시작했는데...웬걸...모든 세척을 다하고 정리하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적당히 씻어내고 넣었어도 됐겠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펜촉부터 모든걸 다 분리하고

안에 굳어있는 잉크가 다 나오도록, 잉크를 녹이고 빼내고,

주로 카트리지를 쓰는데 컨버터를 찾아와 물을 넣고 빼내면서 안에까지 모두 세척을 진행했다.

그리고 잉크들이 흘러나오며 뚜껑 안쪽을 더렵혀 종종 손을 더럽히기도 하였기 때문에,

뚜껑 안쪽까지 세세히 닦아 내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닌 일 같았지만, 세시간이나 걸렸고, 밤에 세세하게 찾아본다고 고개도 숙이고, 그리고 계속 물을 버리고 갈아주고 확인하느라 서있다보니 조금 힘들었다.

그러던 중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막힌 잉크를 뚫어내려면,

그저 미봉책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개선하려면

예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드는구나.


차가운 물도, 뜨거운 물도 안되고, 미온수에 담가야만 만년필도 상하지 않으면서 불순물들을 꺼낼 수 있구나

그렇게 오랜시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시간을 들여도,

물에 아무런 잉크가 묻어나오지 않을정도로 꺠끗하지기는 쉽지 않구나.


이게 비단 만년필을 깨끗히 씻어내는 것에 국한된 일 일까.


이후에 새로운 색의 카트리지를 끼워넣어도, 본연의 색이 나올때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렸다.

잉크를 흡수하고, 아직 남아있던 물과 섞여 흐린 색이 나오거나

완전히 씻겨나오지 않아 이전에 있던 잉크와 살짝 섞여 나오거나...

온전한 색을 보기 위해 노트를 열고, 책을 읽으며 하이라이트 했던 문장들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서걱서걱소리와 책을 읽던 당시에 어떤 이유에서건 내 마음을 움직였던 문장들.

당시에 왜 하이라이트였을까 싶기도,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공감하게 되는 문장들도...


단순히 만년필을 세척하고 다시 조립해 원래의 색을 보려는 과정이었지만...

불순물이 다시 끼지 않게, 끼더라도 다음번엔 더 적은 양이기를, 그리고 더 수월하게 제거하기 위해

신경써야겠다는 마음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면서


이게 과연,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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