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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Dec 29. 2022

바닐라는 어디 가고 라테만?

스트레스엔 빽다방 바닐라라테

속이 쓰리다. 먹은 게 없으면 없는 데로 속이 쓰리고, 먹은 게 있으면 있는 데로 속이 쓰리다.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스트레스성 위염. 약 25년 동안 함께 해온 적(敵, enemy). 이제는 헤어져도 괜찮을 듯싶은데, 참 끈질긴 인연이다. 오늘도 그 ‘에너미’는 내 속을 시끄럽게 한다.


집안일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 코로나 때문에, 외출 못해서, 친구 못 만나서, 돈 없어서 등등. 스트레스받는 이유는 천 가지도 넘는다. 전업주부라 직장 때문에 스트레스받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다가 결국 병원을 찾았다. 병원도 정말 오랜만이다. 웬만하면 병원은 기피하는 곳이다. 병원은 무섭다. 모르는 병을 알게 될까 봐 무섭고, 주사 맞으면 아프니까 무섭다. 아이들이 병원을 무서워하는 건 당연하다. 나도 무서운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는 무서운 곳 아니라며 울지 말라고 얘기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참 우습다.


접수를 하러 간호사에게 다가간다. 대형모니터가 있다. 이젠 내가 직접 터치해서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그새 참 많이도 바뀌었다. 본인이 직접 접수를 하다니. 얼마나 병원을 안 갔으면 병원시스템이 이렇게 바뀐 줄 도 모르고 살았을까. 아이들 어릴 땐 주야장천 병원에 다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상비약으로 해결했더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러 버렸다. 터치 몇 번의 행위는 쉽게 할 수 있지만 간호사가 하던 역할을 내가 하려니 좀 거부감이 든다. 그조차도 하기 싫어 대충 했더니 간호사가 나를 부른다. 결국 다시 주소랑 병원방문목적을 입으로 재접수했다.


“선생님 대장내시경 검사 들어가서 15분 이상 기다리셔야 해요.”

“네? 15분이요? 내 앞에 8명이나 있는데요?”

“네 그러니까 15분 ‘이상이요.”


ISTJ유형인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8명이 5분씩만 해도 40분인데 15분 이상이라니. 말이 맞지 않는다. 30분 이상이라고 얘기해야 맞지 않나? 병원의 두려움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의문만이 남는다. 15분, 20분, 30분이 지나고 거의 1시간이 됐을 무렵,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냥 30분 이상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해줬다면 다른 방안을 고민했을 텐데 속아서 기다린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속이 쓰리고요. 가스가 차요.”

“위내시경 언제 받으셨어요?”

“지난주요. 만성 표제성 위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위에 관련된 약 다 지어줄 테니 일주일 드셔보시고 불편하시면 또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진료시간은 1분 남짓. 의사 선생님을 1분 만나려고 1시간을 기다렸다니. 분통이 터진다. 스트레스 때문에 약 지으러 왔다가 스트레스받고 병원 문을 나선다. 내가 문제인가, 간호사가 문제인가. 못마땅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단 걸 먹어야 한다. 단 걸 찾아 커피숍을 찾았다. 습관처럼 먹는 바닐라라테를 주문한다. 여기저기 바닐라라테를 찾아 먹어봤지만, 내 입맛에는 빽다방의 바닐라라테가 최고다. 바닐라향 같은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달달한 맛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 캐러멜마키아토도 먹어봤지만 그건 또 너무 달아서 속이 불편하다. 내 기분을 딱 좋게 만드는 그 단맛. 생각해보니 참 까다롭다. 단순하게 단거 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안 되나. 나한테 맞는 단맛의 정도를 찾아서 대령하라니 남들이 보면 콧웃음 칠 듯하다.


미세먼지로 공기는 나쁘지만 햇살은 좋은 11시 30분경. 나의 최애 바닐라 라테와 점심으로 먹을 김밥, 비빔만두를 사들고, 뽀드득뽀드득 눈을 살포시 밟으며 집으로 왔다. 속이 안 좋아서인지 베스트메뉴 비빔만두도 입에 맞질 않고, 김밥도 몇 개먹으니 배가 부르다.


바닐라라테로 기분을 전환시켜 보자. 한 모금을 목구멍에 넘기려는 순간, 아! 이거 아닌데. 단맛이 없다. 바닐라라테가 아니다. 그냥 카페라테다. 이런, 나의 바닐라라테는 어디 간 거지? 내가 주문을 잘못했나? 메뉴가 바뀌었나? 하필 영수증도 없고 확인이 안 된다. 급하게 빽다방앱에 들어가서 주문금액을 확인해 본다. 가격은 항상 주문했던 그대로이다. 아무래도 종업원의 실수 같다. 어쩌지? 주문하고 들어온 지 2시간이 지난 후였다. 처음 있는일이라 너무 당황스러워 계속 고민을 한다. 나가서 바닐라시럽만 받아오는 건 너무 귀찮고, 전화해서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방책이 없다.


결국 그냥 라테를 마시기로 한다. 한 모금, 두 모금. 맛이 없다. 아니 맛이 없진 않았다. 단맛에 가려진 우유의 고소한 맛. 담백한 그 맛. 이것도 나쁘진 않다. 살이 덜 찔 것 같아 죄책감 없는 맛이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기분이 좋아지지 않으니 라테를 먹을 의미가 없다. 우울한 맛이다.


결국 임시방편으로 사놓은 ‘바리스타룰스 로어슈거 에스프레소 라테’를 집어 들었다. 이 커피도 냉장커피 중엔 나의 최애다. 설탕도 30% 줄이고 락토프리 우유로 완성한 깔끔한 맛이란다. 그래서인지 당류가 13g밖에 되지 않은 깔끔하고 적당한 단맛이 날 사로잡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 갔다가 스트레스받고, 스트레스 풀려고 바닐라라테 샀다가 또 스트레스받고. 그래 이게 인생이지. 뭐든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한 데로 흘러갈 리 있겠냐마는 그래도 결국 대책을 찾아 이 위기를 모면했으니 됐다. 바닐라라테는 못 먹었지만 냉장커피라도 먹고 기분 풀었으니 된 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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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다음날, 어제 못 마신 바닐라라테를 사러 다시 빽다방에갔다. 어제일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바닐라라테를 무료로 주겠다며 친절을 베푸신다. 시럽만 빠졌기 때문에 500원을 차감하고 결제하겠다고 했지만 카페라테와 바닐라라테는 다른 메뉴이므로 새로 주시겠다고 했다.


남에게 피해 입히는 게 싫은 나는 피해를 입고 받는 친절이 살짝 부담으로 느껴다. 그래서 한사코 새로 받는 것에 대해 거절을 했지만 죄송해하는 마음과 그 친절한 태도에 못 이기고 결국 무료로 바닐라라테를 받아 나섰다.


괜히 말했나 착잡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 한편에는 단골이니까 괜찮다는 기쁨의 소리가 함께 했다. 어쨌든 커피 한잔은 공짜였으니까. 어제 마시지 못한 바닐라라테의 단맛까지 더해져 두배로 달콤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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