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 전부터 산타선물을 준비했었는데이번엔 왜 이리 시간이 촉박할까. 아마글 쓴다고 이래저래 시간을 다 쓴 모양이다.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는데 뭘 사지?
포켓몬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위해 포켓몬 관련 장난감을 찾아본다. 찾았다! 포켓몬 레고 오르골. 만들 수도 있고 예쁜 소리도 나니 맘에 들어할 것 같다. 그런데 웬걸, 해외배송으로 2주 이상 소요된단다. 어쩌지.
산타선물 고르다가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결국 고르고 고른 것이 포켓몬 학용품세트다. 노트, 필통, 연필, 지우개, 스티커, 핫팩에 딱지까지 다양하게 들어있는 것이 만오천 원. 가격도 저렴하고 좋긴 한데, 장난감이 아니라서 좀 서운해할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기프트카드다.
얼마 전 첫째가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된 적이 있다. 아이는 너무나 가고 싶어 했고, 난 좀 불안했다. 친구 집에 가면마스크 벗고 먹고 마시고 놀 텐데 어쩌지. 고민도 잠시, 아이가 마스크 쓰고 놀겠다고 약속을 한다.
본인 용돈으로 친구 선물을 직접 준비하게끔 시켰다. 집 앞 문구점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포켓몬 카드를 산 뒤 포장을 해서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 친구가 좋아하는 걸 사야 하는데 본인이 좋아하는 걸 사는 아직 철없는 어린애다.
어땠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좋아하는 치킨, 피자, 떡볶이 잔뜩 먹고 친구들이랑 게임하고 너무 재미있게 놀다 왔단다. 친구생일선물에 대해 물으니 친구들 다 기프트카드를 선물로 줬다고 한다.
“기프트카드? 그게 뭐야? 그런 걸 어디서 사?”
“구글기프트카드라고 편의점에서 팔아. 그걸로 게임도 하고 그러는 거야.”
크리스마스 3일 앞두고 기프트카드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구글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아뿔싸. 이건 안 되겠다. 이걸 사면 아이에게 게임하라고 부추기는 꼴이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집에 돌아와 생각해 낸 건 현금이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산타인척 열심히편지를 써서 인쇄한 다음 그 옆에 작은 스티커로 현금 만원을 붙였다. 포켓몬 학용품과 함께 담아 초록색 크리스마스 무늬 리본으로 묶어서 완성했다. 아이들이 현금을 보고 좋아할 생각에 나름 뿌듯했다. 현금 선물은 처음이니까.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여행을 다녀왔었던 터라 너무 피곤했지만 12시가 될 때까지 졸다가 깨기를 반복, 선물을 트리 앞에 겨우 두고 잠들었다. 아침 7시쯤부터 소곤소곤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또다시 연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by라미
“이게 뭐야? 산타할아버지 왔다 갔네. 좋겠다”
“웅! 내가 좋아하는 포켓몬이야. 노트랑 핫팩이랑 지우개랑 연필이랑 갖고 싶었는데 비싸서 못 사고 있었거든. 근데 산타할아버지가 줘서 너무 좋아”
“와~ 좋겠다. 산타할아버지가 다 알고 선물 줬나 보다!”
둘째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포켓몬 문구가 갖고 싶었나 보다. 천만다행이다. 사길 잘했어. 첫째는 조금 시큰둥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역시 착한 첫째.
“엄마! 근데 산타할아버지 편지가 꼭 엄마가 쓴 거 같아”
“뭐, 뭐라고? 그, 그, 럴리가.”
“편지 내용만 보고 어떻게 엄마 말투를 알아? 엄만 편지 안 썼어”
순간 당황했지만 급 정색하며 그럴 리 없다고 얘기했다.
“근데 이 리본도 집에 있는 건데?”
“리, 리본이 뭐 우리 집에만 있겠어? 문방구 가면 다 파는 건데. 산타할아버지도 똑같은 거 있나 보지. 크리스마스 리본은 거의 다 이런 무늬야”
아차, 그런 것까지 기억해낼 줄이야. 너무 방심했다. 설마 당황한 표정이 다 드러난 건 아니겠지.
용돈을 받았으니 용돈기입장 앱을 다운로드 받아서 쓰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아이가 앱을 다운로드하려는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서 내 핸드폰메모에 적어둔 비밀번호를 보겠다고 한다. 난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건넸다. 용돈기입장을 다 다운로드하고 난 뒤에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 편지 엄마가 쓴 거예요? 메모장에 산타할아버지 편지랑 똑같은 내용이 있는데요? 엄마가 산타예요?”
허걱. 머리가 하얘진다. 어쩌지? 그래도 초등 때까지는 산타의 동심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들키는 것인가. 망했다. 순간 뇌리에 스치는 생각. 인정할 건 인정하자. 다시 발연기를 펼칠 때다.
“에고, 들켰네. 실은 산타할아버지가 안 올까 봐 엄마가 산타할아버지인척 편지랑 용돈만 트리 밑에 놔뒀거든. 그런데 산타할아버지가 와서 포켓몬선물에 엄마 편지를 넣어두고 갔나 봐”
“아 진짜요? 그럼 그렇지. 편지내용이 엄마 말투더라니까!”
“엄마 들통났다. 헤헤”
위기 모면한 거 맞나? 둘째 아이는 쉽게 믿는 눈치인데 첫째 아이는 글쎄 잘 모르겠다.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가. 진짜 망했다.
아이들은 학용품을 잔뜩 늘어 뜨려 놓고 한참 포켓몬 대화를 나누더니 딱지치기를 시작했다. 그저 해맑은 아이들을 보니 민망하면서도 흐뭇하기도 하고,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벌써부터 근심걱정이 시작됐다.
첫째는 5학년. 이제 6학년이 된다. 알건 다 아는 나이. 분명 학교 친구들도 산타는 없다고 할 테지. 혼자 산타는 있다고 우길 만큼 용기 있는 아이는 아니니까. 부모님이 산타라는 걸 알고 있지만 내색만 안 하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본다.둘째는 이제 3학년이 된다. 아직은 산타가 있다고 믿을 나이. 여전히 순수한 아이들이다.
첫째는 선물을 받기 위해 산타를 믿는척하고 둘째는 아직 어리니 산타를 믿고.
이 산타연기를 언제까지 해야 할까?
오늘도 우린 그냥 그렇게 서로 속아가며 아이는 선물을 받고 부모는 아이의 동심을 지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