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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Jan 31. 2023

지긋지긋한 돌밥

밥 먹을 시간이다.

아, 밥 하기 싫다.  

    

우렁각시 어디 갔니.

밥 좀 해 다오.     


뱃속에는 뭐가 들어있는 걸까.

쓸데없이 배는 계속 고프다.   

   

배고프면 속 쓰린데.

쓰린 속을 붙잡고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본다.     


시끄러운 꼬르륵 소리.

귀찮음을 이긴 배고픔.     


오늘도 돌밥 시작이다.

밥 차리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처음 가던 그날이 떠오른다. '점심식사 준비' 이벤트에서 해방되던 그날. 먹는 것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점심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뻥 뚫린 기분을 느껴보았는가. 그건 시원섭섭한 휑함이 아니라 시원한 바닷바람 같은 자유였다. 거짓말 좀 보태서 황홀하다고나 할까. 처음 느껴본 그 해방감과 자유는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이유식부터 전쟁은 시작되었다. 형형색색 다양한 채소를 하나하나 다듬고 다져서 냉동 팩에 고이 얼려놓고, 한우로 육수를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온갖 고생을 해서 밥을 대령하면 아이는 노느라 음식을 거부한다. 그거 하나 먹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건강한 음식, 다양한 영양소 섭취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나날들. 과연 아이가 그 노력을 알아줄 날이 오기나 할까.      


어린이집 보내고 나서 점심을 먹고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었다.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이유식이 시작됐고, 잠시 꿈같은 시간들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앞치마를 매고 다시 요리 전쟁에 뛰어들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새로운 음식들을 대령하느라 힘이 부쳤다. 매번 소금과 간장으로만 간을 해서 먹었더니 매콤한 게 당긴다. 나 먹자고 매운 음식을 만들기엔 좀 귀찮고 번거롭다. 결국은 같은 음식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일이 두 배로 늘었다.   

   

아이들이 초등생이 되니까 식성이 늘었다.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고 한다.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줬더니 애는 돼지가 되었다. 살이 다 키로 간다고는 하지만 내가 볼 땐 이건 그냥 살이다. 지방세포가 커져서 생긴 살덩어리들. 운동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키로 간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짜증이 밀려온다. 노력에 대한 보상은 다 어디 가고 또 다른 시련만 남아있단 말인가. 음식조절에 들어가야 했다. 매콤한 음식, 안 매운 음식, 살 덜 찌는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일이 세배로 늘었다.     




남편은 현재 재택근무 중이다. 아이들도 방학을 했다. 한 달째 온 가족이 복작복작 붙어있다. 나는 하루종일 삼시 세끼를 아등바등 준비다. 큰맘 먹고 열심히 만들면 한 끼에 다 먹어 해치운다. 먹고 나면 다음 끼니 걱정을 한다. 어떤 재료로 뭘 해먹을지 고민하고, 재료가 없으면 인터넷장보기를 서두른다. 뒤돌아서면 밥 해야 한다고 해서 ‘돌밥’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겠지.


하루 세끼 밥 차리는 것에 지친 나는 쌀 안치는 것을 남편에게 부탁했다.

“밥 다 먹었네. 밥 해야겠다.”

“벌써? 엊그제 밥 했는데 다 먹었다고?”

전에는 밥 한번 해서 냉장고에 소분해 두면 3~4일은 거뜬했는데 지금은 이틀이면 사라진다. 얻어먹기만 하던 남편도 이제 깜짝 놀란다. 이렇게 빨리 먹을지 몰랐다며 황당해한다. 이제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리라.   

   

돌밥은 엄마의 최대 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비새끼처럼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힘들다고 밥을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귀찮다고 끼니를 건너뛸 수는 없다. 결국 하루에 한 번은 대충 먹기로 다짐한다. 돌밥 생활을 버텨내려면 융통성을 발휘해야지.

냉동실 속 냉동식품 by라미

“오늘 점심은 뭐 먹을래? 피자랑 스파게티? 아님 만두, 떡볶이, 어묵 먹을래? 라면이랑 짜파구리도 있어.”

“피자!!”

“난 떡볶이!!”

“엄마 그냥 피자 떡볶이 다 먹으면 안 돼요?”     


냉동실에 꽉 채운 냉동식품들을 하나하나 열거해 가며 아이들에게 선심 쓰듯 점심을 선택하게 한다. 대충 때운다고 하기에는 종류도 다양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엄마는 조금 편해보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오히려 열심히 만든 음식보다 더 좋아한다.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참 우습다.     


이제 한 달 뒤면 방학이 끝난다. 그럼 다시 그때처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겠지. 점심 한 끼만 안 해도 정말 살 것 같은데, 시간은 참 더디게만 흘러간다. 오늘이 어제인지 주말인지도 헷갈리는 시간 속에서 돌밥에서 해방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힘을 내보자. 속이 쓰려오기 전에 음식을 하러 주방으로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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