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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Feb 23. 2023

'학자스민' 같은 아이

화훼단지에 들어서자마자 꽃향기가 날 취하게 한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화분들이 날 보고 손짓한다. 어서 나를 데려가라고. 카트에 모조리 싣고 싶지만 좁디좁은 공간에 모두 다 데려갈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식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빠 때문일 테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 항상 식물이 있었다. 초록초록한 식물에 물을 주며 가꾸는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손바닥만 한 행운목은 아빠보다 더 크게 자랐고, 생신 때마다 사드린 식물들은 몇 년째 반들반들한 잎사귀를 뽐내고 있다. 10년 넘게 살던 집에서 평수를 줄여 이사를 하면서 결국 큰 화분들은 다 처리했지만 적당한 크기의 예쁜 꽃화분들은 아직도 함께하고 있다.


화분에 물 한번 제대로 준 적도 없고 화분을 보며 힐링을 한 적도 없는데 어쩌다가 식물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의아하다. 그냥 보고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까. 결혼을 하고 난 뒤로 우리 집에도 식물이 하나둘 늘어갔다. 처음에는 새집증후군을 걱정하며 한두 개 구입했고, 전자파에 좋다고, 공기정화에 좋다고 해서 구입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 맘이 이끄는 대로 화분을 계속 샀다. 어쩌다 보니 죽지 않고 잘 자라주어서 지금은 약 50여 종의 화분들이 거실에 꽉꽉 들어서 있다.


거실에 화분이 넘쳐나는데도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오면 싱숭생숭한 마음에 화훼단지에 간다. 초록초록 식물을 보며 꽃향기를 맡으면 남편도 힐링이 된다며 선뜻 먼저 가자고 제안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남편도 느낀다. 하지만 그뿐이다. 화분에 물도 좀 주고 분갈이도 도와주면 참 좋으련만 그냥 보는 것만을 즐길 뿐이다. 나의 취미를 남편에게 강요할 순 없으니 좋아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2월 중순이다. 아직도 바깥바람이 차고 6시만 돼도 깜깜한 겨울인데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봄이 다는 것을 온몸이 느끼고 있다. 계획도 없이 급작스럽게 화훼단지로 향한다.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지만 드라이브 겸 바람을 쐬러 나간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곳이 이제는 재잘거리는 대화가 짧게 느껴질정도로 가까워졌다.


식물을 좋아하는 이들은 봄이 오는 소리를 모두 느꼈으리라. 아직 이른 봄이지만 화훼단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엄마를 따라 나온 어린아이부터 정정하신 노부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족히 100평은 돼 보이는 넓은 이곳에 식물과 사람들로 복작복작하다. 이미 구입을 하고 나가는 사람들 양손에는 예쁜 꽃들과 초록식물들이 한가득이다.


어떤 식물이 들어왔을까. 봄이 오고 있으니 예쁜 꽃을 좀 사야겠다. 설렘을 안고 구경을 시작한다. 사람이 너무 많아 딸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아이에게 사고 싶은 꽃을 골라보라고 한다. 영특한 딸아이는 친구처럼 대화가 통한다. 이 화분은 꽃이 덜 피고 저 화분은 잎사귀가 예쁘지 않다고 소신 있게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


꽃향기를 맡아보며 향이 좋은 꽃화분을 사기로 한다. 하늘하늘 보라색꽃 캄파룰라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조금 비싸지만 꽃다발보다는 저렴하므로 꽃이 시들기 전까지 꽃감상을 해보리라 생각하며 카트에 담았다. 하얀색꽃인 학스민은 향기가 진하다. 꽃망울이 많은 화분으로 아이가 골라온다. 저렴한 마라고데스는 꽃이 오래간다고 해서 선택한다.  향이 천리까지 간다고 해서 붙여진 천리향도 꽃망울이 많은 것으로 골랐다.


길을 지날 때마다 카트 안에 있는 꽃들이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이미 행복하다. 이것이 소확행이리라. 이미 핀 꽃들은 바로 감상하며 향을 맡고,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꽃을 피우면 천천히 감상해야겠다. 나름 꽃을 오래 보려는 나만의 계획을 세운다.


(왼)마라고데스 (오)천리향 by라미
(왼)학자스민 (오)캄파눌라 by라미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부터 거실에서 이상한 탄내 비슷한 냄새가 난다. 남편이 계란프라이를 태웠나 주방으로 가본다. 그러나 태운 음식은 없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화분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한쪽 구석에 있던 학스민이 꽃을 피웠다. 그런데 냄새가 독하다. 내가 생각했던 향긋한 냄새가 아닌 엄청 진한 향인데 뭔가 나랑 맞지 않는 향이다. 이런 꽃향기는 처음이다.


<학자스민>
달콤한 향의 꽃을 피우는 덩굴성 관엽식물로 실외나 실내, 온실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인기 있는 인테리어용 식물이다. 공기정화 능력이 있어 새집증후군의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를 제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달콤한 향의 꽃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리 맡아도 달콤한 향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으니 거실 한쪽 구석에 둔다. 아이들은 냄새가 독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난리법석이다. 꽃을 사놓고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상황이 올 줄이야. 참 난감하다.


며칠 동안 냄새가 독하다며 중얼중얼 잔소리를 했다. 너는 왜 이리 냄새가 독하냐며 타박을 했지만 꽃은 알아듣지 못한다.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해서 꽃은 스스로 향기를 없애지도 못한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니까 그저 본인의 자리에서 꽃을 피울 뿐이다. 점점 꽃은 더 많이 피고 향은 더 짙어진다.


아이라고 다를까. 생김새가 다르듯 성격도, 매력도 다르다. 천리향처럼 멀리까지 향을 내뿜는 아이도 있고, 가까이 가야만 향기가 나는 캄파룰라 같은 아이도 있다. 만져야만 향이 나는 유칼립투스 같은 아이도 있으며, 누구보다도 진한 향을 내는 학재스민 같은 아이도 있다.


내 아이는 학재스민 같은 아이다. 그 진한 향이 감당하기 벅차다. 그 향을 바꾸고 없애기 위해 지금껏 부단히 애써왔다. 잘못된 부분들, 고쳐야 할 것들을 부모로서 알려주고 가르쳐야 하는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잔소리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아이가 내뿜는 그 진한 향은 그냥 타고난 성향이었다. 그냥 그러한 매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큰아이가 6학년이 되고 보니 이제 알겠다. 내 아이의 향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바꾸려 하지 말고 그 아이의 매력을 인정해 줘야겠다. 학스민의 향기를 맡고 있으면 진한 향기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지만 그냥 인정하고 오랫동안 꽃을 바라보니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향은 점차 익숙해지고 활짝 펴가는 꽃송이들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있다.   


피기 시작한 학자스민 by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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